“나는 인애를 원하고” (호세아
6:1-6)
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매 제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4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5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저희를 치고 내 입의 말로 저희를 죽였노니
내 심판은 발하는 빛과 같으니라.
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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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년 수를 자랑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나는 모태신앙입니다.
나는 30년 동안 교회를 다녔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아직 한 번도 제대로 다 읽어보지 못 했습니다. 그래도 여기 저기 읽은 것 다 합하면 한 번 읽은 것은 될걸요??
세상의 학문은 16년을 마치면 학사학위를 받습니다.
거기에 5-7년을 더하면 박사학위를 받을 것입니다.
어떤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받으면, 그 분야를 다 안다는 뜻은 아니지만
자기가 연구한 부분은 조금 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박사학위를 받는 사람의 교육연한이 20여 년이라고는 하지만 그 전
기간을 전심으로 연구한 것은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신앙생활을 20여 년을 했다고 하고 그 중에
몇 년을 전심으로 심혈을 기울여서 했다고 하면 하나님을 아는데 박사가 되어있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에 대하여 전체는 일평생 신앙생활을 잘하여도 알 수 없겠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아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은 성경말씀을 통하여 어떤 삶을 우리에게
살아나가기를 원하시는지는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아직도 하나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다른 사람들에게 확신을 갖고 얘기할 수 없는 것은 신앙의 년 수는 자랑하지만 하나님을 아는 일에 힘쓰지 않은
까닭은 아닐까요?
성 어거스틴(St. Augustine, 354-430)은 자신이 신앙의
대단한 경지에 들어가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 스스로 자부하기도 했습니다.
어거스틴이 어느 날 꿈을 꿨습니다. 그는 꿈속에서 천국에 갔습니다.
천국의 입구에서 천사가 “너는 누구냐”라고
묻습니다.
그는 대답합니다: “나는 어거스틴이며 신실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때 천사가 다가와 어거스틴을 자세히 보더니 말합니다: “너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야. 네 머리 속에는 키케로의 철학으로 가득 차 있어. 너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야.”
천사는 어거스틴에게 호통을 치며 다시 땅으로 내려가라고 말합니다.
어거스틴이 놀라서 눈을 떠보니 꿈이었습니다. 그 꿈은 어거스틴으로
하여금 객관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됐습니다. 그는 그 꿈으로 인해 철저하게 회개하였으며
결국엔 성자가 되었습니다.
교회를 일주일에 몇 번 출석하는가 하는 것이 그 사람의 신앙이 어떠한가를 판단하는 절대적 기준은 안 되지만, 대강적 기준은 됩니다.
특별히 매 예배마다 잘 출석하던 사람이 빠지는 회수가 늘어남을 보면서 ‘아 이 사람의 신앙에 문제가 생겼구나’라고 짐작하게 되는데, 이러한 짐작은 어느 정도 맞아떨어집니다.
어떤 사람에게 ‘성도님, 왜 요즘
교회출석이 뜸하여졌습니까?’라고 물으면, 그 사람은 ‘아 요즘 정신 없이 바쁘거든요. 좀 한가해지면 다시 나가지요.’라고 대답합니다.
교회에 출석하는 일은, 더 정확하게는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을 아는 일은 한가해지면 하는 여가선용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장 바쁘게, 가장 힘써서 할 일입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매여 사는 일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무엇 때문에 이 세상을 바삐 살아가고 있습니까?
어떤 지위에 오르기 위해서입니까?
일정한 액수만큼의 돈을 벌기 위해서입니까?
은퇴 후에 평안한 삶을 누리기 위해서입니까?
이 세상에서 우리 삶의 종착점은 어디입니까?
우리는 이 세상에서는 ‘죽음’이라고 하는 종착역을 향하여 달리는 인생들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바삐 살아가는 이유가 인생의 은퇴 이후에 있을 우리가 믿는 하나님과의 만남이 기쁨이 되기 위한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서울에 있는 대형교회 중에 하나인 온누리 교회의 고 하용조 목사님이
어느 신문과 인터뷰했습니다.
그가 대형교회의 담임목사이기 때문에 매일 매일 참으로 바쁜 나날을 보냅니다. 그런데, 그는 거의 늘 한 가지 이상의 병을 갖고 살고 있습니다. 그것이 감기나 몸살 정도의 가벼운 병이 아니라 무슨무슨 암이나 고치기 어려운 병명들입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병원에 입원해 있거나 집에 자리를 펴고 누워 요양을 하고 있든지, 아니면
스스로 조금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기도원에 가서 하나님께 매달려 고쳐달라고 간구하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중병(?)에 든 몸으로 여전히 대형교회의
담임목사로 목회를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는 병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지 못한 적이
없습니다.”
만일 우리의 삶에 중심에 주님이 계신다면, 하나님을 만나는 일보다 우리에게 중요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을 아는 일에 가장 시간을 할애하고자 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세상의 어떤 것보다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보다 우리가 더 바쁘게, 최우선적으로 심혈을 기울여서
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2
오늘 본문의 1-3절은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는
회개이며 4-6절은 이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십니다. 1-3절에 나오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부르짖음은 철저한 회개 같으나 그러나 실제의 삶에서 하나님께 진정으로 돌아옴이 없는 불성실하고 잠간뿐인 입술만의 뉘우침이었습니다.
1절: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5장 15절에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서 저희가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기다리리라. 저희가
고난을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여 이르기를”이라고 한 다음에 6장
1절 이하의 이스라엘과 유다의 부르짖는 회개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들의 문제는
뉘우치기는 잘하는데 고침이 없음입니다.
‘그런 일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내가 왜 그랬을까?’ ‘다음엔 정말 하지 말아야지.’
그런데 다음에 후회한
일을 반복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회개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슙’의 뜻은 ‘돌아오다, 돌아가다’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죄(罪)’라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은 ‘회개(悔改)’이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은 ‘의(義)’입니다.
진정한 회개에는 뉘우침과
고침이 있습니다.
뉘우침이 진행하던 죄의 길을 멈추게 하고, 고침이 진행하던 방향을 바꾸어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회개할 때 시편 23편
3절에서 다윗이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라고
고백한 것 같이 영혼의 소생함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나 죄 짓는 삶을 살 때 징계하시는 하나님이시지만 그들이 회개할 때 그들을 용서하시고 위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의 백성을 찢으시고
치시기도 하지만 그들이 회개할 때 도로 낫게 하시고 싸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2절: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여호와의 치유와 회복, 그리고 구원의 역사는 속히 임합니다.
“이틀”이라고 하는 것은 짧은 기간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과 유다가 그들의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 앞에
돌아올 때 하나님께서는 신속히 그들을 치유하시고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제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라고 한 것은 하나님께로 돌아온 백성을 구원하시고 소생시키심입니다.
“제삼일”은 예수님의 부활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부활 모티브라고 하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의
죽은 것 같은 상태에서 그들을 소생시키기에 필요한 기한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소생시키시고
일으키실 때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3절: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나님의 자녀 된 자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알되 힘써 전심으로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면 신실하시고 한결같으신 변함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약속을
변개함이 없으시고 은혜를 내려주시되 마른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그렇게 촉촉이 내려주시는 분이십니다.
4절: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로
돌아오겠다고 하나님을 힘써 알겠다고 입술로는 말하지만 여전히 세상의 죄 가운데 방황(彷徨)하는 이스라엘과 유다에게 물으십니다: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이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할 줄을 모르셔서 물으시는 물음이
아닙니다.
에브라임--곧 이스라엘이, 유다가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이 분명한데도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는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안타까운 심정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회개하고, 힘써서 하나님을 알고자 할 때 그들이 고백한 대로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 가운데 늦은 비와 같이 임할 터인데, 그들의 진실이 없는 부르짖음이 하나님을 안타깝게 합니다.
4절과 6절에 나오는 “인애(仁愛)”는 히브리어 헷세드를 번역한 것인데 이는 신실하고 변함이 없는 지속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대하여 갖고있는 사랑은 일시적(一時的)이고 변덕(變德)스러우며 쉬 없어지는, 모양(模樣)만이 있는 아침구름이나 이슬과도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 없는 한결같은 것인데,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아침과
저녁 때가 다른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의 결혼생활에서, 혹은 남녀의 연애에서 한편이 이와 같을 때, 그 결혼생활이나 연애(戀愛)는 곧 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하나님에 대한 지속적인 사랑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사랑한다
입으로 반복하나,
우리의 삶에서 그것이 나타나지 않을 때 이는 모양(模樣)만 있는 사랑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우리 가운데 있는 작은 자를
긍휼(矜恤)로 대함으로서 확증(確證)될 수 있다고 말씀하시고, 요한은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함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함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5절: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저희를 치고 내 입의 말로 저희를 죽였노니 내 심판은 발하는
빛과 같으니라.
하나님은 진정한 회개가
없는 백성들을 징계하십니다.
이스라엘과 유다는 하나님께로
돌아온다고 하고,
하나님을 힘써 알겠다고 하지만, 하나님께로 향한 신실함이 없고 여전히 세상의 우상과
탐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진정한 회개와
인애가 없는 백성을 말씀으로 치시고 심판하실 수밖에 없는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아합의 시대에 하나님은
엘리야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좇을 것인지 세상의 우상인 바알을 좇을 것인지 결단하라고 촉구하십니다.
열왕기상 18장 21절에서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는 무엇을 좇고 있습니까?
이 세상을 살기 때문에
이 세상임금인 사단에게 더 많이 속하여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이 세상을 살고 있지만 우리의 주님이신 하나님께 속하여 하나님을 향한 변함 없는 한결같은 인애의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6절: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6절에서 하나님은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고 하십니다.
구약의 제사는 신약의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제사 그 자체를
원치 않으십니까?
하나님께서 원치 않으시는
제사는 인애와 긍휼이 없이 드려지는 제사입니다. 제사를 드리는 의미는 잊어버린 채 형식적으로 드리는 제사는 열납치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가인이 첫 소산(所産)으로 제사를 드렸지만,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이,
하나님께 감사함이 없이 드렸기에 이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 소제와 번제의 제사를 드리지만,
그 안에 그들의 죄와 허물에 대한 회개가 없고, 하나님과 화목되고자 하는 마음이
없고,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없고,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헌신(獻身)이 없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제사를 원치 않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제물을 드리라고 하신 것은 그 자신이 물질이 궁하셔서 그것으로 생계(生計)를 유지하셔야 하기에 드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제사에 앞서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원하시며 형제를 용서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상
15장 22절에서 사무엘을 통하여
사울에게 말씀하실 때,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 23-24절에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머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는 우리의 전부를--인격과 자랑까지도 다 바치는 제사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2장 1절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living sacrifice)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禮拜)니라”고 말씀합니다. 몸이라 함은 우리의 인격과 품성을 포함한 우리의 전부(全部)입니다. 곧, 우리의 인격과 자랑과 마음과 모두를 다 주님께 내어 맡기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예와
같이 낮아져서 우리의 사는 삶을 통하여서 전적으로 주님께 헌신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로마서 12장 2절에 있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는 삶”입니다.
6절 후반에서 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번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합니다.
주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면서 그분께 헌신과 결단의 표시인 번제를 드리는 것은, 누구의 결혼식인지도 몰고 참석하여 덩달아 기뻐하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며, 누구의 초상(初喪)인지도 모르면서 참석하여 밤새도록 우는 사람의 모양이며, 교회에 예배드리러 와서 부처님을 찾고
있는 자의 어리석음입니다.
히브리어의 '알다'(야다)는 지식적인 앎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이고 체험적인 앎을 말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을 사귀는 것' 혹은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진실로 원하시는
것은 일상생활 속에서 그분과의 사귐에 들어가 하나님의 영, 곧 성령으로 변화되어 그분의 뜻을 살아가는 삶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며 하나님을 안다고 하며, 하나님과 기도로
교통함이 없이 하나님을 안다고 하며, 하나님을 체험함이 없이 하나님을 안다고 하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지 않고 있으면서 하나님을 안다고 쉽게쉽게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실상을
보지 못하며,
우리 마음속에 그려놓은 하나님의 허상을 바라봄이며 이를 위하여 제사 드림입니다.
3
음란(淫亂)하고 부정(不貞)한 이스라엘까지 사랑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 믿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통하여 말씀하실 때, 우리에게 변챦고 한결같은 신실한 인애-긍휼을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은 사랑의 마음으로 드려지는 제사만을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하는 제사는 우리 속에 거짓된 마음이 없이 겸허하고 낮아지는 마음으로 우리의 삶 전부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실상을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모르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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