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August 2, 2015

“이방인의 사도된 바울” (갈 2:6-10)


“이방인의 사도된 바울” (갈 2:6-10)

           
 
  2:6   유명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명한 이들은 내게 더하여 준 것이 없고
     7   도리어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기를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이
        한 것을 보고
     8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고로 삼으셨느니라.
     9   또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 이는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10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썼노라.
 

1
한국에는 참으로 교회가 많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한 블록에 교회가 일곱 여덟 개가 몰려 있고, 심지어는 사오 층으로 된 건물의 삼층에는 장로교회, 이층에는 감리교회, 지하에는 성결교회 식으로 교회가 삼 사 개까지 있는 경우를 보았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먼저 들어선 교회를 제하고 그 후에 들어선 두 세 개의 교회는 분명히 기존 교회의 사역 영역을 침범한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백여 년 전 외국 선교사님들이 한국에 복음을 전하려고 처음 입국하였을 때, 그들은 선교대상지역을 분할하였다고 합니다. 해서, 함경도는 캐나다 장로교회가 맡고, 평안도, 경기도, 서울과 경북은 미국 북 장로교회, 전라도는 미국 남 장로교회, 황해도와 충청도는 미국 북 감리교회, 강원도는 미국 남 감리교회, 그리고 경남은 호주 장로교회가 각각 맡아서 복음전도의 사역을 담당하였다고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15장 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 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고 말씀했는데, 요즘의 교회들의 생기고 없어짐에 있어서 성경적인 사역의 원리는 전혀 무시되고 장사꾼의 원리가 적용되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많이 몰린다고 소문이 난 지역에는 교회가 한 두 개로 시작하여 갑자기 수십 수백 개로 늘어납니다. 한국에서는 분당이 그 대표적인 예인데, 분당이 신도시로 개발되기 시작할 무렵에는 교회가 그리 많지 않고 있어도 작은 교회들이더니 분당에 세워진 교회들이 잘 된다고 소문이 나니까 기존의 큰 교회들도 분당에 대형교회를 짓고 그쪽으로 이사합니다. 이사해도 교인들을 잃을 염려가 없는 것은, 한국에서는 이미 유명세를 얻은 목사님이 사역하는 교회에는 두 세 시간도 멀다 않고 와서 그 ‘유명한’ 분의 ‘유명한’ 설교 듣기를 원하는 까닭입니다. 그로 인하여서 문제가 되는 것은 처음에 작은 규모로 교회가 없던 곳에 무명의 개척 교회를 시작한 목사님은 이 대규모의 유명세 앞에 맥을 못추고 그나마 유지하고 있던 소수의 교인마저 빼앗겨 버리고 사역의 근거를 잃어버리고 고군분투하거나 무너져 내림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마치 장사가 잘 된다고 소문난 지역에서 기존에 소규모로 장사하던 소규모의 가게들이 대형상가가 들어섬으로 문을 닫을 수밖에 없게 되는 현상과 같습니다.

한국사람들의 교회 세움의 열심은 미국의 이민 사회에서도 결코 뒤지지 않습니다. 캘리포니아에는 한인교회가 1,000개를 넘어서 1,500개를 향하여 달리고 있고, 뉴욕 시에만 7-800개 이상의 교회가 있다고 하고, 뉴저지 주와 같이 작은 주에도 300개 가량의 한인교회가 있다고 합니다.

한 지역에 기왕에 세워진 여러 교회들이 부정적인 영향만을 주는가 하면 긍정적인 면도 있습니다.
한 조그만 지역에 여러 교회가 들어서게 된 것이 사람들의 주장이 맞지 않아 둘로 나뉘고 또 나뉘어진 교회 안에 서로 화합할 수 없고 내분이 생겨서 또 다시 다른 교회가 세워지는 경우를 흔히 봅니다.



사람의 생각과 주장으로 교회가 갈리고 세워지는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들의 사역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라고 할 때 이 복음전파의 유효성은 긍정적인 면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지만”(1:15), “전파되는 것이 그리스도인 까닭에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1:18)고 그들이 각각 달리 전파하는 동기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지만 전파되어지는 대상이 그리스도인 것에 대해서는 기뻐한다고 긍정적인 반응을 나타냈습니다.

같은 지역에 한인 교회가 여러 개 있는 것의 또다른 긍정적인 면으로서는 나의 취향에 맞는 교회를 선택할 폭이 그만큼 넓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취향에 따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만을 듣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믿는 사람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를 듣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목사님들 중에도 전적으로 하나님 말씀만을 풀이하여 설교하기를 원하는 목사님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 말씀을 해석하기보다는 믿는 사람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를 구수하게 잘하는 목사님도 있습니다. 한 타운에 교회가 여럿 존재하는 정당성은 사람들이 구하는 것이 각각이고, 그들이 원하는 예배 형태가 각각이기 때문입니다.

2
바울은 당시에 예루살렘의 유명한 사도들에 비하면 변두리의 무명한 사역자였습니다. 아직도 예루살렘의 사도들 중에서 그리고 많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거나 주저하는 사람들이 많은 입장이었습니다.
변두리의 무명한 사역자이긴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사도로 삼으신 것과 그가 전하는 복음의 내용이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임에 자긍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개척하고 복음을 증거하고 말씀을 가르친 갈라디아지방의 교회들에 속한 성도들이 원래 사역자인 자기의 말은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서 그들이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예루살렘의 유명한 사도들이 사람들 편에 전하는 한 마디는 대단한 것으로 여기며 그들이 이제까지 듣고 배운 복음도, 말씀의 가르침도 버릴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작은 교회에서 흔히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작은 교회 목회자는 오히려 순수한 열정으로 그 교회 교인들에 말씀을 준비하여 교인들에게 전하려고 하는데 이는 듣지 않고 먹지 않으려 하며, 그와 전혀 상관이 없는 소위 유명한 목사님의 그와 무관한 (방송이나 테이프를 통하여 들은) 설교는 대단하게 들리고 그 설교를 통해서는 은혜를 받았다고 이야기하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그 전혀 상관이 없는 유명한 목사의 설교가 그에게 은혜(?)가 되는 것은 그의 신앙의 삶에 부담을 주지 않고 다만 재미있게 들리기 때문입니다.

   6절: 유명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명한 이들은 내게 더하여 준 것이 없고

“유명하다는 이들”(ʾαπὸ τών δοκούντων)이 누구인가 하면 주의 형제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입니다.
본절을 보면, 바울이 이들의 유명세를 폄하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데 바울의 의도는 그것이 아니고 그들의 파견자를 자칭한 사람들에 의하여 갈라디아 교회들에 속한 성도들의 마음이 동요됨을 안타까이 여김입니다.
요즘도 뉴욕이나 로스엔젤레스(LA) 등 큰 도시에서 한인 교회들의 연합 집회의 설교자로 한국의 유명 교회들 중에 목사님을 초청합니다. 그리하면, 유명하다는 그분의 설교를 듣기 위하여 수천 명이 모여드는데, 이 유명한 목사님의 설교는 그분이 오랜 경륜에서 나오는 유머나 경험을 듣고 즐기는 것이 대부분이지 그분이 잘 알지 못하는 (혹은 피상적으로 아는) 그 지역 이민 교회들과 사회가 갖고 있는 병폐를 구석구석 지적하여 교회들과 성도들을 각성시키는 말씀은 기대하기가 어렵습니다.

“저 유명한 이들은 내게 더하여 준 것이 없고”라고 말씀한 것은 이방 교회들을 복음 증거에 있어서 예루살렘의 유명한 사도들이 바울보다 나은 것이 없으며 바울이 증거한 것 이외에 더하여 준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당연한 것은 그 지방과 그 교회와 그 교회에 속한 성도들의 사정은 현재 그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님이 가장 잘 알기 때문입니다.

괄호 안에 있는 말씀은 바울 자신과 그의 사역에 대한 변론입니다. 신명기 10장 17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의 신이시며 주의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말씀의 인용인데,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신 것이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믿고 확신하기에 예루살렘의 유명한 사도 앞에서 기죽을 것이 없습니다.
그의 학벌이나 과거야 어쨋든 현재 큰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목사님은 어깨에 힘이 들어갑니다. 과거에는 얼마나 많은 실패를 했건, 교인들에게 어떤 푸대접을 받았건, 한국적인 상황에서 큰 교회 목사님들은 떠받듦을 받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작은 교회 목사님들은 큰 교회 목사님 앞에 서면 주눅이 듭니다. 사정,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큰 교회 목사님은 하나님의 인정과 축복과 능력이 나타나는 목회자요 자신은 변명하자면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지만 아직은 하나님의 인정과 축복과 능력을 받지 못한 목회자라고 스스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는 자신의 목회와 말씀 증거에 확신이 없는 태도입니다.

바울은 당시에 시골의 작은 교회의 무명한 목회자였지만 서울의 대형교회의 유명한 목회자와 같은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 앞에서 주눅이 들지 않습니다. 이는 그의 사도권이 온전히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것이며, 그가 전하는 복음이 오직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음에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편지를 쓰는 지금도 안타깝고 답답한 것은 갈라디아 교인들의 마음이 유명세를 따라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7-8절: 도리어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기를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이 한 것을 보고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지역들과 교회들을 위해 사역자들을 택하시고 직임을 맡기실 때, 현재 능력이 많은 한 사람에게 모든 교회들을 감독하고 사역하게 하지 않으시고 각각의 교회의 사정에 따라 각각의 목회자를 정하시고 사역하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능력이 많은 유명한 목사님이라고 하더라도 어떤 작은 교회의 사역에 관한한 그 작은 교회의 사역자보다 나을 수 없고, 그 작은 교회의 사역자는 그에게 그 교회를 위임하신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응답을 구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목회를 감당하여야 합니다. 교회가 크든지 작든지 하나님께서는 그 교회의 능력에 따라서 달란트를 허락하시어 경영케 하셨습니다. 따라서, 큰 교회는 큰 교회 나름대로, 작은 교회는 작은 교회 나름대로 주신 달란트의 사명에 감사하고 이를 잘 경영하여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를 할례자들--유대인들--에게 복음 전하는 사명을 맡기신 주님께서 바울을 부르실 때 그에게는 무할례자--이방인들--에게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맡기셨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바울을 얕보고 그의 일을 무시할 것이 아니고 자기의 일에 충실할 것이며, 바울은 베드로를 시기하고 그 앞에 주눅들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할 것입니다.

   9절: 또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 이는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러 가던 바울을 빛 가운데 임하신 그리스도께서 다메섹 도상에서 부르시고 이방인의 사도 삼으신 것이 바울을 향하신 주님의 크고 놀라우신 은혜였습니다. 바울은 이를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기둥(στύλος: pillar, column)은 교회라고 하는 건축물에 반드시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이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들(στύλοι)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심한 비바람 속에서도 오랫동안 꿋꿋하고 흔들리지 않고 변치 않는 믿음을 지켜왔기 때문입니다. 기둥이 되는 목재를 얻기 위해서는 나무가 오랜 세월 동안 자라야 하되, 비비 뒤틀려서 오래된 것이 아니라 굵고 반듯하게 자라야 합니다.
어떤 교회가 잘 되기 위해서는 그 교회에 굵고 반듯하고 꿋꿋한 기둥의 재목들이 많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계속 건축물들을 확장해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2장 21-22절에서 “그(=그리스도)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기둥은 없고 뒤틀린 잡목만이 있는 교회는 교회로서 존립하기에 항상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우선 작은 건물을 짓기 위해서라도 기둥 몇 개는 반드시 필요한데, 바라기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따라 교회의 기둥이 되시고, 석가래가 되시고, 벽돌이 되시고 기타 필요한 구성자료들이 되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교제의 악수”를 하였다고 했습니다.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을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사도로 삼으시고 바울과 바나바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사도로 삼으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누가 더 잘났다 못났다를 따질 일이 아닙니다.
따라서, 서로의 사역을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교제의 악수”를 나눔은 상대방의 사역을 인정하여 주는 모습입니다. 각각 다른 지역에서 사역을 감당하지만 서로를 인정하고 위해서 기도하고 교통함이 필요합니다.

한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의 역할, 장로의 역할, 권사의 역할, 집사의 역할, 직분을 받지 않은 사람의 역할이 다르지만, 그 안에 갈등하고 반목할 것이 아니라 서로의 각기 다른 직분에 대한 인정이 필요하고 서로 격려할 것입니다. 이러한 서로 다른 직분의 존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교회의 사명과 직임을 감당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10절: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

각각 사역의 대상과 장소가 다르지만 그들이 공동으로 힘 쓸 것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하고 구제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많은 교회들은 스스로 자신들을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한국의 대부분의 교회들에서는 기본적인 믿음이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지만 헌금실적에 따라서 장로의 피택권이 주어집니다. 따라서, 가난한 사람은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장로가 될 수 없습니다. 물론 부자라도 인색한 헌금을 하는 사람도 장로가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과연 바른 현상입니까?

여기서 “가난한 자들”은 복음 전도의 대상으로서 가난한 자들도 포함할 것이지만 특별히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예루살렘의 유명한 사도들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생각해 달라”고 부탁하였다고 했는데, 바울은 이를 강압적인 당부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보통 중앙 상급기관의 한 마디 부탁은 부탁이 아니라 명령에 가까운 강제적 수행능력이 있는데 바울은 그 자신이 예루살렘의 기둥보다 못한 것이 없다고 여기고, 그의 사역이 그들이 감당하는 사역보다 부족하지 않다고 확신하기에 그들의 부탁을 협조사항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의 당부가 아니더라도, 바울 스스로 가난한 자--특별히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는 일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으며, 그들의 당부 이전부터 그 일을 힘써서 행하여온 터입니다.
사도행전 11장 27-30절에 보면 바울이 본격적인 전도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가난한 형제들을 구제하는 일을 감당했으며 바울의 삼차 전도여행은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구제하기 위한 모금 캠페인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 비중이 높았습니다(롬 15:25-27; 고전 16:1-4; 고후 8-9장).

3
성도들은 주님을 위한 각자의 사명을 하나님 안에서 자랑으로 여기며 그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할 것입니다. 우리의 사명 감당함은 나의 외적 조건이 좋아서가 아니요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개별적인 뜻과 계획이기에 나만의 특별하고 귀한 사역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와 기쁨을 드려야 할 일입니다.

교회 안에 각각 다른 직분들이 있습니다. 그 직분들이 서로 반목하고 대립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라고 하는 신앙공동체 안에서 서로 협력하고 연합할 것입니다. 이로써 나에게 독특한 직분과 달란트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서 맡겨주신 달란트를 잘 경영할 것입니다.

그위에 크고 작은 교회들의 존립 목적과 그 각각 다른 모양의 교회 속에 나의 신앙생활의 목적과 의미를 바로 인식하여 나만의 평안과 안일 가운데 빠져들 것이 아니라 주위의 나보다 못한 사람들을 생각하고 그들을 위해서 주님의 사랑과 은혜가 전달되어지는 일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Sunday, July 12, 2015

“헛되지 않은 달음질” (갈 2:1-5)


“헛되지 않은 달음질” (갈 2:1-5)

           
  2:1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노니
     2   계시를 인하여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저희에게 제출하되
        유명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3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라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으니
     4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5   우리가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


1
어떤 악기 연주자가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하여서는 연주회에 앞서서 다른 모든 것들로부터 자신을 차단하고 부단하고 반복되는 연습을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연주회에서는 그가 피나게 준비한 곡들을 우아하고 자신에 넘치는 모습으로 잘 연주해냅니다. 이렇게 할 때, 그의 모든 준비과정과 그의 연주자로서의 생이 헛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자질이 있고 고된 연습을 쌓았다고 하더라도 그가 건강을 제대로 돌보지 않아 연주회를 앞두고 병이 난다면 그의 모든 수고가 헛된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육상경기에 임하는 선수의 경우도 이와 같습니다. 한 경기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서 준비하는 선수는 거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직 그가 출전하는 경기에만 몰입합니다. 그의 몸을 최상의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서 평소에 그가 좋아하는 것도 삼가야 합니다. 그리고 경기에 출전하여서는 규칙에 따라 경주하여야 합니다. 그가 아무리 달리기를 잘한다고 하더라도 규칙에 어긋나게 약물을 복용하거나, 트랙 안쪽으로 발을 디뎠다거나, 또 다른 모양으로 규칙을 어기면 그의 모든 재능과 수고가 헛된 것이 되기도 합니다.

한 연주자로서, 한 선수로서, 한 인생을 사는 사람으로서 그가 경주하는 것이 헛되지 않기 위해서는 때로는 포기하고 희생할 것들이 큽니다. 믿는 사람으로서 우리 믿음의 경주와 또 그 훈련과정이 이와 같다면, 아니 이러하지는 못하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 주님으로 향한 꾸준함이 있고,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고자 하는 마음과 의지가 있다면 우리의 믿음의 경주도 헛된 달음질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2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빛 가운데 임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 삼 년의 세월을 아라비아의 사막과 다메섹에서 보냈습니다. 그곳에서 기도로써 주님과 교통하고, 주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사명을 준비하고, 전도자의 출발을 하였습니다(갈 1:17).
삼 년이 지났을 때, 그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게바를 만나 예수님에 관하여 좀더 알기를 원하였고 그곳에 머물면서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하였습니다. 바울의 담대한 증거로 말미암아 그들이 그를 죽이고자 할 때 그는 이를 피하여 수리아의 가이사랴를 경유하여 그의 고향이었던 길리기아의 닷소에까지 이릅니다(갈 1:21). 그 과정에서 그는 꾸준히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을 감당하였습니다.
그가 고향 닷소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을 때,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파견을 받은 바나바가 안디옥을 거쳐서 사울을 찾으러 닷소에까지 오고 그들은 함께 안디옥 교회에 머물면서 일 년간 큰 무리를 가르쳤는데 이때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란 일컬음을 받게 되었습니다(행전 11:22-26). 그 후에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아 갈라디아를 포함하여 소아시아 지역의 선교를 감당하고 돌아옵니다.

   1절: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노니

“십사 년 후”라고 함은 바울이 게바를 만나기 위하여 일차로 예루살렘을 방문한 이후 십사 년이 경과되었음을 가리킵니다. 그 기간동안 바울은 예루살렘의 사도들과는 별도로 나름대로 주님과 교통하고,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여왔습니다. 그런데, 그(와 바나바)의 복음증거와 사역에 대하여 그가 정해진 규칙의 한계 밖에서 복음을 증거한다는 중상과 비방의 목소리가 들리기에 이에 대한 변론 겸 그의 사역을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지도자들에게 알게 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방문할 때,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간 것입니다.
이에 관하여 사도행전 15장 1-2절에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바울과 바나바와 저희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에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고 했고, 계속해서 4-5절에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2절: 계시를 인하여 올라가 내가 이방인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저희에게 제출하되 유명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계시를 인하여 올라갔다”라고 함은 바울이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이 그 자신에 대한 비방을 변론하기 위하여 임의로 내린 결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매 예루살렘을 방문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어떻게 이방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고 그가 전한 복음의 내용이 무엇인지 설명합니다. 곧,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이외에는 어떤 것도 의로와지고 구원받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위에  바리새파 유대인 크리스천들이 주장하는 할례나 모세의 율법을 지킴은 구원의 요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상하는 자의 입을 통하여 바울이 ‘하나님의 율법은 도무지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고 하여 비방꺼리가 된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율법 지킴이 구원의 요건이 되지 않음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만일 할례나 율법지킴이 구원의 요건이라면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믿음은 헛것이요 구원의 어려움에 또 한 가지 어려움을 더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바울은 그의 복음을 변론하기 위하여 “유명한 자들에게 사사로이(privately) 했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유명한 자들이란 예루살렘 공회에서 기둥처럼 여기던 주의 형제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입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는 복음증거에 대한 전체적인 보고형식으로 하고, 그의 복음의 정당성을 변론하기 위해서는 이들 유명한 자들 앞에서 사사로이 한 것은 그렇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그와 그의 복음의 정당성을 주장할 때 그의 반대자들에 의한 소요로 말미암아 올바른 변론의 기회를 얻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들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이 바울의 복음을 인정하여 줄 때, 그들의 권위와 영향력으로 말미암아 다른 유대주의 크리스천들도 그들이 지지하는 복음의 내용을 용이하게 받아들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교회의 운영(특별히 장로교회들)도 중요한 사안에 대하여 당회가 결정하는 것은 그렇지 아니하고 막바로 교인 전체의 의견이나 결정을 물을 때,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고 은혜스러운 결정을 내리기 보다는 이로써 교회가 시끄러워지고 분열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증거하는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요(1:11),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배운 것도 아니라고 했는데(1:12), 왜 예루살렘 공회의 기둥같은 사도들의 인정함이 필요합니까?
바울 자신은 그가 증거하는 복음이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요 따라서 그 내용에 조금도 잘못된 것이 없음을 확신하지만, 만일에 그 당시 옳고 그름의 판단자인 사도들의 판정이 교회의 질서와 사람들 사이에는 참으로 중요한 것이기에 그들의 인정과 지지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아니할 때, 그가 이제까지 복음 증거자로서 달음질한 것이 헛 것이요 달음질하고 있는 것이 헛될 수 있음을 바울은 알고 있습니다.
이단(異端) 판정을 받은 목사님들의 사역이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은 설령 그분은 자신의 설교의 내용과 사역에 대하여 전혀 거리낄 것이 없지만, 이단의 문제는 정상적이고 건전한 신앙생활을 하고자 하는 성도들에게 거리낌을 주고 따라서 그 교회로 향한 발걸음을 제한하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복음증거자로서 또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달음질하는 경주에 종종 비유합니다.
로마서 9장 16절에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했고, 고린도전서 9장 24-27절에서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 했고, 디모데후서 2장 5절에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라고 했고, 디모데후서 4장 7절에는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달음질하는 경주자로서 그리스도인의 경주자가 헛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로써 믿는 자의 구원과 상급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규정대로 경주하지 않고 자기 멋대로 경주한 사람은 하나님의 상급이 없을 뿐만 아니라 구원에도 이르지 못할 수가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성도에게 교회가 필요하고 교회에 목회자가 있는 것은 각 성도의 달음질을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정하신 규정이 무엇이며 그 한계가 어떠한 것인지 알려주고 그의 달음질을 권장하기 위함입니다.

   3절: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라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으니

바울이 예루살렘을 두 번째 방문할 때 디도를 데리고 갔다고 했습니다. 헬라인 디도가 할례를 받고 안 받음이 바울에게 그렇게 커다란 문제꺼리가 아닙니다. 따라서, 유대주의 반대자들이 바울을 주목함도 있고 하여서 디도에게 할례를 받게 함도 그 긴박한 상황을 무마함의 한 방편이 되려만 바울은 디도를 억지로 권하여 할례를 받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만일 그렇게 하였다면, 그 대치 상황을 모면하는 데는 도움이 되었을 것이지만, 구원을 위하여 할례와 율법의 효력성을 부인하는 바울의 복음은 그 정당성이 약화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할례는 하나님과의 언약의 한 표시로 헌신(獻身)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그 헌신도 구원을 위한 요건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더더욱이 믿음의 표증인 마음으로부터의 헌신이 결여된 외형상의 헌신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해서, 바울은 로마서 2장 28-29절에서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神靈)에 있고 의문(儀文)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4절: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디도로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않은 이유로 바울의 행동을 엿보고자 하는 거짓 형제--거짓 크리스천들을 들고 있습니다. 바울이 사람의 의견이나 비방을 두려워하여 하나님께서 그의 주신 자유와 확신과 담대함을 저버리는 사람이 아님을 드러내고자 함입니다.
만일 디도가 그 스스로 원함이 있었다면 할례를 받게 하였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바울 스스로가 그를 엿보는 거짓 형제로 말미암아 그와 그의 형제 디도의 자유를 제한시키고자 함이 없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강조하는 바울입니다.
믿음으로 의로와지고 구원받는 사람에게 그리스도께서 아울러 자유함을 주셨습니다. 사단이 지배하는 세상에 여전히 살아가고 있지만 이제는 사단의 종이 아닙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의 종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도의 의로와지고 구원받음이 율법에 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율법으로 인해서는 구원에 이를 육체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킴은 구원의 요건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유자로서 나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여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감사하고 기뻐서 나 스스로의 자발적인 의지와 헌신으로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이것을 지키라고 기록되어 있어서도 아니요, 목사님이 강압적인 설교로서 이것을 지키지 아니하면 큰 일 날 것처럼 말씀해서도 아니요, 나의 기쁘고 자발적인 선택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게 합니다.
이것이 종이 아닌 자유자의 즐거움이 넘치며 건전한 신앙의 삶의 모습입니다.

   5절: 우리가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

만일 엿보는 자에게 눈치가 보여서 헬라인 디도를 할례 받게 하였다면 이는 율법에 종노릇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작은 일처럼 보이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러한 율법주의에는 일시라도 복종치 않고자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가 전하고 그가 지키는 복음의 내용과 진리가 항상 빛을 잃지 않게 하기를 원함이 바울에게 있었습니다.
사단이 하나님의 진리와 진리 지키는 자를 넘어뜨리고자 크고 중요한 문제를 갖고 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한 번쯤 무시해도 좋을 문제, 흔히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사람들이 간과하기 쉬운 문제를 갖고 나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들로 넘어지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사단은 이 일을 빌미 삼아서 다음 번에는  좀더 중요한 이슈를 가지고 믿는 사람을 미혹합니다. “너 지난번에 한 일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인 줄 아니? 아니잖아? 그런데 이번에는 왜 안 된다고 그래? 지난번에 그 일이나 이 일이나 안 되기는 마찬가지야. 그러나, 염려할 것 없어. 너의 하나님은 용서의 하나님인데, 이번 한 번만 더 하는 것 큰 문제 아니야. 한 번 더 한다고 별 일이야 있겠어. 다음 번부터 안 하면 되잖아. 다음 번에는 네가 하지 않겠다면 나도 너를 그냥 내버려둘게.”라고 부추깁니다.
이렇게 하여 작은 일에서 그의 믿는 바 진리를 저버린 사람은 다음 번에도, 그 다음 번에도 동일한 미혹을 이기지 못합니다.

3
바울은 그의 전하는 복음과 복음의 진리가 온전히 전파되고 지켜지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되 그 일이 그에게나 그의 동역자들에게 억지가 아니라 자유와 기쁨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기를 소망하였습니다.
바울은 그의 일생을 달려가는 경주자로서 그의 달음질이 헛되이 여겨지지 않기를 바라고 또 헛된 것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이를 위하여 더욱 더 하나님과 교통하고 그에게 말씀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하기를 원하였습니다. 크리스천으로서의 우리의 일생이 경주자의 삶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경주할 때 향방 없는 자같이 아니할 것이며, 우리의 푯대를 향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경주가 기쁘고 자유하는 자의 경주가 되기 위하여 우리의 마음 속으로부터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이 넘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의 전도의 결실” (갈 1:21-24)

“바울의 전도의 결실” (갈 1:21-24)
           
 
  1:21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22  유대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 알지 못하고
     23  다만 우리를 핍박하던 자가 전에 잔해하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24  나로 말미암아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니라.
 

1
제가 아는 인도네시아 선교사님이 현지에서 인도네시아인들을 위한 교회 건물을 짓다가 겪은 어려움을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공사 현장에 매일 주위의 불량배들이 나타나 뚜렷한 이유도 없이 교회 짓는 일을 방해합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날마다 이들에게 시달리다 못한 선교사님은 무슨 수를 내야 되겠는데 뾰족한 방법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이들을 처리 좀 해달라고 떼를 써보는데도 별로 반응이 없으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쨋든 그들과 부딪혀보기로 작정합니다. 해서, 어느 날 그들이 나타나자 그 가운데 가장 힘이 세 보이는 사람에게 다가가서 담판을 짓습니다. “당신이 나를 힘껏 때려서 내가 쓰러지면 당신들의 요구대로 따르겠습니다. 교회 건물을 짓지 말라고 하면 짓지 않을 것이요, 돈을 달라고 하면 돈을 주겠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를 힘껏 쳤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그대로 버티면 앞으로는 우리의 공사를 방해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랬더니, 과연 이 불량배들이 흥미로와합니다. ‘감히 겁도 없이 내 주먹을 맞아보겠다고...’ 하며 그 불량배들의 두목 격으로 보이는 사람은 실실 웃으면서 이 선교사님이 내건 조건에 순순히 응합니다. 선교사님은 맞을 준비를 하고 속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가 저 불량배의 주먹에 맞을 터인데 하나님의 교회와 선교를 위해서 쓰러지지 않고 견딜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힘 세 보이는 불량배가 선교사님의 배를 겨냥하고 있는 힘을 다하여 일격을 가합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선교사님은 맞은 것 같지도 않게 끄떡없이 버티고 서있는데 일격을 가한 그 두목은 ‘어이쿠’ 외마디 소리와 함께 저만치 나가 뒹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순간적으로 선교사님의 복부를 강철같이 단단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하여 그 다음부터는 공사 현장에 불량배들이 얼씬도 하지 않게 되고, 선교사님은 교회를 아름답게 완공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선교를 잘 감당할 수 있었다고 간증하십니다.

미국의 기독교 작가 필립 얀시(Philip Yancey, 1949 -)의 ‘러시아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글입니다: 

   “나는 러시아에서 은혜에 굶주린 국민을 보았다. ... 러시아의 보통 사람들은 고개를 푹 숙이고 말을 잃은 채
   허공을 맴도는 것이 꼭 매맞은 어린아이 같았다. ... (그러나) 러시아를 떠날 때 나는 앞으로 바뀌어야 할
   많은 것들에 현기증과 동시에 강한 희망을 느꼈다. 맨살만 남은 황폐한 도덕의 땅에서 사체(死體)의 모양을
   따라 자라나며 황무지를 쓰다듬는 한 점 푸르른 땅, 즉 생명의 싹을 본 것이다. ...
   이념은 사라졌지만 그리스도인 신앙은 살아 남았다. 지금 교회는 무섭게 재기하고 있다. 이런 모습은 처음이다.
   ... 어쩌면 하나님의 나라의 미래는 한국, 중국, 아프리카, 러시아 같은 곳에 속한 것일지 모른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What's So Amazing About Grace?) 중에서

“항구에 있는 배는 안전하나 그것이 배를 건조한 목적은 아니다”(A ship in a harbor is safe, but that is not what ships were built for.)란 말이 있습니다. 이는 안전, 평안이나 생존이 우리 인생의 의미 있는 목적이 아니란 뜻입니다. 우리 인생이 어느 곳으로 가기 위해서 때로는 한치 앞을 알지 못하는 모험도 감수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인생은 현상유지(maintenance)가 아니라 모험(adventure)"인 까닭입니다(John C. Maxwell의 글 중에서).
우리의 교회나 개인의 신앙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로서, 개인으로서 우리는 작은 배일 수도 있고 큰 배일 수도 있습니다. 큰 배이건 작은 배이건 모든 배는 항해(航海)를 목적으로 건조된 것입니다. 그저 아무 일도 안하고 가만히 있는 것이 가장 안전한 것 같으나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 아닙니다.

「The Perfect Storm」(완전한 폭풍)이란 영화가 있습니다. 물고기를 잡고 귀환하던 어선(Andrea Gail)이 폭풍을 만나고 100피트(30미터)나 되는 거대한 파도와 싸움하는 것을 그린 영화입니다. 심한 풍랑과 싸우는 도중에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기도 합니다. 결국에 커다란 파도에 삼키는 바 되어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하지만 그들은 폭풍과 싸우는데 최선을 다하였으매 웃으면서 최후를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신자들이 신앙생활을 해나갈 때 하나님께서는 때로 교회에 어려움을 주기도 하시고 교회에 속한 성도들을 흩으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교회에 어려움이 임하는 것이 반드시 나쁜 일만은 아닙니다. 어려움으로 인하여 교인들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할 수만 있다면 이는 오히려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사도행전 8장 1절에 보니까,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예루살렘의 교회와 성도들이 핍박을 당하게 하시고 그들을 모든 땅으로 흩으셨습니까?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의 강림하심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맛본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으로 찾아가서 복음증거의 사명을 감당하려고 하지 않고 “여기가 좋사오니” 하며 오직 예루살렘에만 머물러 있으려고 하니까 집사 스데반이 죽임을 당하는 박해를 통하여 성도들을 흩으신 것입니다.
거기에 더하여서, 사도행전 12장에서는 준비된 그릇인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허무하게(?) 죽게 하시고 베드로를 투옥 당하게 하심으로 예루살렘의 성도들을 더욱 더 흩으십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때로 사람의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사와 권능을 보이시기 위하여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들에게 초인적인 힘을 실어주시는 대신에 때로는 무기력한 죽임을 당케 하시며 박해와 흩어짐을 당케 하십니다. 그러나, 기이한 것은 이러한 박해와 흩어짐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사역은 결과적으로  더욱 크게 드러나며 확장된다는 것입니다.

                                                                             2
다메섹에서의 바울의 개종과 아라비아에서의 준비와 다메섹 전도, 예루살렘 방문 등은 이러한 박해와 흩어짐의 과정 가운데 있었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18-20절에 기록된 15일간의 예루살렘 방문과 그 다음 21절에 나오는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으로의 옮겨감을 기술함에는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겪은 고난이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병행구절인 사도행전 9장 26-30절에는 헬라파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그를 죽이려고 하는 움직임과 그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을 떠나서 가이사랴를 경유하여 수리아(안디옥)와 길리기아(다소)로 옮겨가는 경로에 대해서 적고 있습니다. 9장 28-30절에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고 말씀합니다. 그 마음이 직선적이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로 말미암아 복음증거를 감당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바울은 그가 가는 곳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의 은총을 담대히 증거하였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그의 신상에 평안할 날이 없었지만 그는 이에 개의치 않고 더욱 더 전심으로 복음을 증거하고자 했습니다.

   21절: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바울이 예루살렘을 방문하였을 때에 십오 일만 머물려고 작정하고 간 것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형편이 좋으면 그곳에서 오래 머물면서 유대인들을 향한 전도를 감당하고자 했었습니다. 주님은 그를 이방인의 전도자로 삼으셨지만 그의 마음 속에서는 동족인 유대인에게 더욱 머물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유대인의 사역을 막으십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의 방해와 핍박으로 바울은 가이사랴를 거쳐서 안디옥(수리아)으로 피해갑니다. 이때도 그랬고 이후에도 그러하지만 바울의 전도의 결실은 이방 지역에서 거둘 수 있었습니다.

수리아 지방의 한 도시인 안디옥(Antioch)은 후에 바울의 세계선교의 기반이 됩니다.
사도행전 11장 24-26절을 보면, 바울이 수리아 안디옥을 지나 길리기아 다소(Tarsus)에 머물고 있을 때 바나바가 다소로 바울을 찾아와 그를 안디옥으로 데리고 오고 안디옥에 있는 교회에 일 년간 머물면서 무리를 가르치고 이때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수리아 안디옥은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처음 불리게된 의미 있는 장소입니다.
그리스도인(Christian)이 무슨 의미입니까?
그리스도에 속한 사람,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곧, 그리스도께서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며 그가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이 우리에게 귀한 것은 우리 스스로가 그리스도의 제자요, 일꾼이요, 군병임을 인정하고 그 일을 감당하고자 할 때입니다.
길리기아 다소는 지금의 터키 남동쪽에 위치한 작은 도시로서 바울이 태어나고 자란 곳입니다. 바울은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아들로 이곳에서 태어났던 것입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빛 가운데 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이 주후 32년(또는 33년)경이고, 개종이후 예루살렘을 처음 방문한 것이 삼년 뒤인 35년(또는 36년)경이고, 그가 첫 번째 전도여행을 떠나는 것이 47년경인 것으로 볼 때, 예루살렘을 떠난 그가 수리아와 길리기아에서 보낸 햇수는 십 년에 가까운 세월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간동안 그의 전도의 열매가 얼마나 풍성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다만 오늘 본문의 간단한 언급 외에 다른 자세한 기록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본격적인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시기 위하여 그를 훈련시키신 곳이 수리아와 길리기아입니다. 이곳에 십년을 머물며 전도하게 하심으로 더욱 큰 그릇으로 준비시키신 것입니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다소에서 복음증거를 하게 하심으로 가까운 사람들에게 먼저 복음이 전해지고 받아들여지게 하십니다.

   22-23절: 유대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 알지 못하고 다만 우리를 핍박하던 자가 전에 잔해하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발 없는 말이 천리(千里)를 간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전에 바울이 그리스도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잔해했을 때에 그 소문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다메섹에까지 퍼졌었습니다(행전 9:13, 20-22, 26). 그런데, 이제는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서의 바울의 복음 전도의 사역이 또한 예루살렘과 유대와 다른 지역에까지 퍼져나갑니다. 좋은 소식은 퍼지는 힘이 나쁜 소식 보다 약한데도 불구하고 이와 같이 온 유대지역에 바울의 전도에 대해서 퍼진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왕성하게 복음을 증거한 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게 합니다. 은혜와 사랑의 체험이 크면 클수록 그 기쁨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습니다.

교회와 교회에 속한 사람들을 박해하고 잔해하던 바울이었는데, 그가 변화되어서 잔해하던 사람들의 믿음을 전한다고 하니 이 얼마나 놀라운 변모입니까? 그리스도를 믿은 후의 우리의 변화가 이와 같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에는 하나님은 계셔도 그만 안 계셔도 그만이었지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를 체험한 다음에는, 나같이 변변치 못하고 죄 많은 삶을 살아가던 자를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이를 증거하고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세우신 교회를 위하는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찬송가 4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의 작사자 존 뉴톤(John Newton)의 묘비에는 그의 생애가 다음과 같이 요약되어 있다고 합니다. “한 때 이교도였으며 탕자였고 아프리카 노예상이었던 존 뉴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풍성하신 긍휼로 말미암아 용서받고 크게 변화되어 마침내 성직자가 되었으며, 자신이 그토록 오랫동안 부인했던 바로 그 믿음을 전파하며 버킹검에서 16년 간을, 올니 교회에서 무려 27년 간을 봉사했다.”

   24절: 나로 말미암아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니라.

이 얼마나 듣기 좋은 말입니까? “나로 말미암아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의 삶은 축복이 넘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평과 원망의 말로 알게 모르게 하나님을 근심시켜 드리며 영광을 가리울 때가 있습니다. 바라기는, 우리 교회에 속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마다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분들 되기를 축원합니다.

3
인생을 살아가는데 ‘긍정적인 생각--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생각’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만 통용되는 것이 아니라 믿는 사람들에게도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의 의지(意志)와 신념(信念)으로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만, 우리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능력주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 4:13)는 믿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나는 비록 약하고 부족하지만 내 안에서 역사하시며 내게 능력주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교회 안에서 온전하고 능력이 많은 일꾼이 될 수 있고, 전도의 놀라운 것도 감당할 수 있으며,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도 살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