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January 4, 2015

“연보다운 연보” (고후 9:1-5)

“연보다운 연보” (고후 9:1-5)
       
 
  9:1   성도를 섬기는 일에 대하여 내가 너희에게 쓸 필요가 없나니
     2   이는 내가 너희의 원함을 앎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마게도냐인들에게 아가야에서는
        일 년 전부터 예비하였다 자랑하였는데 과연 너희 열심이 퍽 많은 사람들을
        격동시켰느니라.
     3   그런데 이 형제들을 보낸 것은 이 일에 너희를 위한 우리의 자랑이 헛되지 않고
        내 말한 것같이 준비하게 하려 함이라.
     4   혹 마게도냐인들이 나와 함께 가서 너희의 준비치 아니한 것을 보면 너희는 고사하고
        우리가 이 믿던 것에 부끄러움을 당할까 두려워하노라.
     5   이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1
성경에 나오는 첫 번째 예물 드림은 창세기 4장의 아벨과 가인의 예입니다.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기에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양치는 자이기에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경에 나타난 기록 중에 ‘첫’ 자가 중요합니다. 아벨은 하나님께 처음 소산의 ‘첫’ 새끼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무엇입니까? 가장 소중한 것이요 구분된 것입니다. 그 예물 드림에 구분이 있고, 마음 중심이 담겨 있습니다. 이리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예물과 예물 드린 사람을 기뻐 받으십니다.

제가 전에 다니던 교회에 한 장로님이 계신데 사업을 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이 분은 일주일 수입 중에 매주일 십일조와 감사헌금을 드리는데, 십일조를 드리기 위해서 매일 소득 중 십분의 일을 따로 떼어놓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장사가 다 끝나는 토요일에 떼어놓은 십일조 몫의 현금을 은행으로 갖고 가서 새 돈으로 바꿉니다. 은행에 새 돈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든지 미처 은행에 갈 시간이 없는 때면 집에서 다리미로 돈을 정성스럽게 다린 다음 봉투에 잘 준비하여서 주일 제단에 바칩니다. 어떤 사람은 그런 장로님의 행동이 딱하다는 표정으로 한 마디 합니다. “장로님, 새 돈이나 헌 돈이나 어차피 은행으로 들어가면 마찬가지인데 왜 그렇게 하세요?” 장로님은 대답합니다. “나는 예물을 하나님께 드리기 때문에 가장 깨끗한 것으로 가장 정성스럽게 준비하여 드리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예물을 드리는 것은 ‘교회’라고 하는 비인격체 혹은 비영리단체에 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지으시고 구원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드리는 것임을 기억하여야 할 것입니다. 어떠한 마음과 준비로 헌금을 드리는가에서도 믿음의 있고 없음이 나타납니다. 믿음은 매사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마음입니다.

2
8장에 이어서 9장에서도 바울은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기 위한 연보 드림에 대하여 말씀을 계속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관심은 ‘받는 일’, ‘생기는 일’이지 ‘주는 일’이나 ‘드리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말씀이 지루하고 싫증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장장 두 장에 걸쳐서 ‘주는 일’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는 ‘주는 일’, ‘드리는 일’을 잘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받는 축복’, ‘생기는 축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1절에 “성도를 섬기는 일에 대하여 내가 너희에게 쓸 것이 없나니”로 시작합니다.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를 위해 연보하는 일에 대하여 새삼 언급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이미 바울이 먼저 보낸 편지인 고린도전서 16장(1-4절)에서 당부한 바요, 고린도 교인들도 일 년 전부터 행하기를 시작한 때문입니다(고후 8:10). 따라서 더 이상 이 일이 왜 필요한지, 얼마를 모금해야 하는지 다시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2절에 “이는 내가 너희의 원함을 앎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마게도냐인들에게 아가야에서는 일 년 전부터 예비하였다 자랑하였는데 과연 너희 열심이 퍽 많은 사람들을 격동시켰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긍정적인 면에 호소합니다.
8장 7절을 다시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내가 너희의 원함을 앎이라.”고 말씀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에게 원함이 있었기에 모금하는 일에 동참하겠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인색함이 그들의 원함을 방해합니다.
모금하는 일에 지지부진한 또 다른 요인은 아마도 거짓 교사들의 부추김으로 인한 바울과의 관계의 악화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요즘 교회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입니다. 담임목사님과 사이가 좋을 때에는 제대로 드리던 헌금인데, 사이가 나빠지면 눈에 띄게 헌금이 줄어듦을 봅니다. 이것이 잘못된 모습입니다. 나의 예물 드림은 담임목사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구분하여서 나의 속마음을 드리는 행위입니다.
오늘날의 헌물 드림의 양태(樣態)에 비추어 볼 때, 일 년이나 지났어도 애초에 작정한 모금을 완성하지 못한 고린도 교인들의 인색함과 지지부진의 결정적인 원인이 여기에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계속하여 고린도 교인들의 긍정적인 면인 “열심”에 대하여 언급합니다.
고린도 교회를 위시한 아가야 지방의 교회들이 일 년 전부터 모금의 일로 준비하였다고 마게도냐 지방의 교회들--빌립보 교회와 데살로니가 교회 등에 자랑하니까 그들도 자극을 받아 동참하더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을 위한 섬김과 봉사의 일에 지역 교회들끼리, 혹은 같은 교회의 교인들끼리 서로 자극을 받고 선의의 경쟁을 하는 것도 좋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선하신 사업이 확장되어질 수만 있다면, 이러한 선의의 경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가까운 교회의 목회자들끼리는 목회정보를 교환하는데, 교인들은 기존의 안일한 신앙상태를 벗어나기를 거부하고 있는 모습을 많이 봅니다. 따라서, 저는 가끔 여러분에게 이웃 교회를 방문하여 그 교회 교인들은 어떻게 신앙생활하고 있나 살펴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그들은 어떤 예배와 모임을 갖고 있고, 어떤 열심으로 어떤 봉사와 섬김의 삶을 살고 있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신앙을 자극시키고 격동하여서 더 근면하고 아름다운 신앙의 삶을 살게 할 수 있다면 유익한 것입니다.
“격동시키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레씨조(ἐρεθίζω)는 ‘어떤 사람의 어떤 일로 자극을 받아 분한 마음이 듦’을 의미하는데 이를 선하게 승화시켜서 하나님의 일을 그 사람보다 더 열심히 감당하고자 할 때 이는 하나님 앞에 기쁨으로 비춰질 수가 있습니다.

한국 교회들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 중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선한 경쟁이 있습니다. 사업을 하면서 열심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 중에 ‘내가 이 교회에서 십일조를 가장 많이 내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십일조를 많이 냄은 하나님의 재정을 풍요롭게 하니 좋은 것이요, 십일조를 많이 낼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사업이 번창하여짐을 의미하니까 이 사람 개인적으로도 좋은 일이라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부자 만들어 달라’는 기도는 안 들어주셔도, ‘나로 하나님의 곳간을 풍성하게 채우는 데 으뜸가는 사람 되게 해달라’는 기도는 들어주십니다. 동일한 목적을 위한 기도이더라도 ‘하나님의 일을 앞세우는 기도’가 지혜로운 기도입니다.

3절에 “그런데 이 형제들을 보낸 것은 이 일에 너희를 위한 우리의 자랑이 헛되지 않고 내 말한 것같이 준비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형제들”이란 8장 16-24절에 언급한 디도와 다른 신뢰할 만한 두 사람입니다. 그들을 보내기에 앞서서 고린도 교인들의 열심과 주의 일을 사모함에 관하여 자랑하였다고 했습니다.

가끔 교회와 교인들에 대하여 불평들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불평과 다툼은 내부적인 문제이어야 합니다. 교회 밖에 나가서는 교회와 교인들을 자랑하여야 합니다.
전도를 하는 사람이, “우리 교회는 목사님을 비롯하여 교인들에 이르기까지 제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어요. 목사님은 너무 고집스럽고, 교인들은 사랑이 없고 다들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들이에요. 그래도 한 번 와 보실래면 그렇게 하세요.”라고 말한다면 이 사람의 전하는 말을 듣고 그 교회에 가고 싶은 생각이 들겠습니까?
그렇다고 없는 것을 자랑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에게나 단점들이 있는가 하면 장점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드물더라도) 장점들을 찾아내어 자랑하고자 할 때, 여기에 교우들에 대한 사랑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들의 장점들을 자랑하였으니 그가 자랑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라고 당부합니다. 아마도 이러한 그의 말이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 같습니다. 그들은 거짓 교사들의 사주를 받아 바울을 함께 비난하고 그의 가르침을 폄하하였었는데 바울은 한결같은 사랑으로 그들을 대하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해서, 바울이 당부했던 말씀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고, 일 년 전에 그리 하겠노라 약속한 대로 연보를 준비하는 일에 힘을 기울이게 됩니다. 처음부터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는 일을 작정한 것을 하나님과 한 약속으로 여기고 이 일에 전력을 다했더라면 가장 좋았을 것이지만, 뒤늦게라도 그들의 주님의 일 사모함과 열심이 자극을 받은 것은 다행스런 일입니다.

4절에 “혹 마게도냐인들이 나와 함께 가서 너희의 준비치 아니한 것을 보면 너희는 고사하고 우리가 이 믿던 것에 부끄러움을 당할까 두려워하노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디도 일행을 미리 파견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는 신뢰할 만한 사람들을 보냄으로 모금하는 일을 격려하고 잘 관리하게 하기 위함이요, 두 번째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미리(이미 일 년이 지나긴 하였지만) 모금의 일(여기서는 모금의 완성)을 준비시켜서 나중에 바울이 마게도냐사람들 몇 명과 함께 고린도 교회에 갈 때 아직도 모금이 완성되지 않아서 낭패를 당하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함입니다. 만일 이러한 일이 벌어진다면, 이는 예루살렘 성도를 구제함에 커다란 차질을 빚을 뿐만 아니라 이제까지 고린도 교인들에 관하여 바울이 말한 모든 자랑이 헛되고 거짓뿐인 말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인들은 물론 바울 자신도 사도의 직분에 손상이 가는 부끄러움을 당할 것입니다.

5절에 “이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고 말씀합니다.
“너희의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한다고 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예루살렘 성도를 돕기로 작정하였을 때 그 금액도 정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얼마를 작정하였는데 일 년이 지나도록 약속한 것을 완성하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바람은 이제라도 연보를 잘 준비함으로써 하나님 앞과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치 않고 기쁨을 얻고자 함입니다. 지난 일을 탓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현재의 기준으로 바울과 마게도냐인들 중에 몇 명이 고린도 교회에 이르기 전에 그들이 일 년 전에 약속한 바를 미리 완료함으로써 이제라도 참 연보다운 연보를 하면 그것으로 족하겠다는 것입니다.

헌금을 드리는 마음자세가 중요합니다. 어떤 소득이 있을 때, 먼저 자기의 쓸 곳을 생각하고 뗀 다음에 남는 것이 있으면 남은 것중에 얼마를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과 소득의 십분의 일(혹은 그 이상)을 하나님의 것으로 떼어놓고 남은 것으로 자기의 쓸 곳을 생각하는 사람과는 하나님의 축복면에서 너무나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집에서 식사를 할 때에도, 만일 자녀가 아버지 어머니가 수저를 드시기 전에 맛있는 것을 먼저 골라 먹으면 말은 하지 않지만 그 자녀에게 섭섭한 마음이 드는 것이 사실인데,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은 어떠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것을 먼저 구분하고 드림이 축복의 비결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연보라고 번역한 헬라어 율로기아(εὐλογία)는 축복(blessing), 선물(gift)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예물을 드림으로 주위의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할 수 있음이 하나님의 축복을 나누어주는 것이요, 또한 미리 정성스럽게 하나님께 드릴 것을 준비함이 하나님의 더욱 커다란 축복을 받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의 성도를 돕기 위하여 미리 준비하는 연보가 하나님의 축복이듯이 매 주일 정성스런 마음으로 예물을 미리 준비함이 하나님의 신령한 축복을 받는 비결임을 깨달아 아시기 바랍니다.

3
두 사람이 하나님께 예물 드리는 일에 관하여 대화합니다.
“나는 하나님께 예물드릴 때, 땅에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동전들을 하늘 높이 던집니다. 동전들 중에 동그라미 안에 떨어진 것은 하나님의 것이기에 하나님께 드리고 동그라미밖에 떨어진 것은 나를 위해서 사용합니다.”
다른 사람이 한술 더 떠서 자기의 예물을 정하는 방법을 말합니다. “나는 동전들을 하늘을 향하여 높이 던집니다. 그 중에 땅에 떨어지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것으로 정하고 땅에 떨어진 동전들은 나의 몫인 줄 알고 나의 필요에 따라 사용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축복 받기는 원하면서 우리의 하나님을 향한 마음은 인색하지 않습니까?
말라기서에서 하나님께서 물리치시는 제물이 무엇입니까?
병든 것, 눈먼 것과 저는 것--사람들에게 찌꺼기 취급받는 것, 거룩하게 미리 구별되어지지 않은 예물은 하나님께서 물리치신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음식이나 물건을 주고도 욕을 먹는 경우가 있습니다. 먹다 남은 찌꺼기 음식을 줄 때, 자기가 입다가 싫증나거나 흠이 있는 의복을 주면, 제 딴에는 좋은 일을 한 것 같으나 욕먹을 일만 있습니다.

사람의 경우에도 구분되고 마음이 담겨있는 것을 좋아하는데 하물며 우리의 창조주 되신 하나님을 대함에 소홀함이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교회에서 예물 드림은 사람에게 바치는 것이 아니요, 비영리단체에게 바치는 것도 아니고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시며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스런 자녀로서 하나님을 대하심에 자신의 가장 귀한 마음과 구분된 예물을 드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이로써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하여 예비하신 하늘에 속한 신령한 축복과 이 세상 살 동안에도 공급하여 주시는 풍성한 축복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신뢰받을 만한 사람들” (고후 8:16-24)


“신뢰받을 만한 사람들” (고후 8:16-24)
           
 
  8:16  너희를 위하여 같은 간절함을 디도의 마음에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17  저가 권함을 받고 더욱 간절함으로 자원하여 너희에게 나아갔고
     18  또 저와 함께 한 형제를 보내었으니 이 사람은 복음으로서 모든 교회에서 칭찬을
        받는 자요
     19  이뿐 아니라 저는 동일한 주의 영광과 우리의 원을 나타내기 위하여 여러 교회의 택함을
        입어 우리의 맡은 은혜의 일로 우리와 동행하는 자라.
     20  이것을 조심함은 우리가 맡은 이 거액의 연보로 인하여 아무도 우리를 훼방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21  이는 우리가 주 앞에서만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선한 일에 조심하려 함이라.
     22  또 저희와 함께 우리의 한 형제를 보내었노니 우리가 여러 가지 일에 그 간절한 것을
        여러 번 시험하였거니와 이제 저가 너희를 크게 믿으므로 더욱 간절하니라.
     23  디도로 말하면 나의 동무요 너희를 위한 나의 동역자요 우리 형제들로 말하면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
     24  그러므로 너희는 여러 교회 앞에서 너희의 사랑과 너희를 대한 우리 자랑의 증거를
        저희에게 보이라.
 

1
집으로 배달되어지는 우편물들 가운데 자선단체들로부터 기부하라고 오는 편지들이 많이 있습니다. 때로는 아무 생각 없이 기부금을 보내기도 하지만, 때로는 기부금을 보내면 이것이 과연 필요한 사람들을 위하여 제대로 사용되어질까 의심하는 마음이 들 때도 있습니다. 기부를 요청하는 행위가 너무나 상업적으로 되어 가는 세상이기에 선의의 피해를 입는 선한 자선단체들도 있게 됩니다.

오래 전에 가뭄과 극심한 경제적 곤란(困難)으로 기아에 허덕이는 북한 동포들을 돕기 위한 모금운동을 미국 내에 있는 기타 교회협의회들, 개 교회들과 자선단체들에서 벌렸고 모금한 돈과 물품들을 여러 기관들을 통하여 북한에 전달하여 주었지만, 때로는 과연 우리가 선택한 단체가 그 일을 정직하게 잘 감당할 것인가? 그 위에 돈이나 물품을 받은 북한 당국이나 관리들이 제대로 고통을 겪는 주민들에게 전달하여 줄 것인가? 의심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이는 그만큼 사람들이 탐하는 것 가운데 으뜸이 돈이요, 또한 돈에 얽힌 부정한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돈을 다루는 일로 봉사하는 분들은 특별하게 정직의 본이 되는 삶을 사는 사람들 중에서 선택되어집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교회의 덕을 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재정이나 회계의 일을 한 사람에게만 맡기지 않고 적어도 두 사람이상이 보는 것도 쓸 데 없는 의심을 받지 않게 하고자 함입니다. 한국의 큰 교회들은 그 재정규모가 엄청난데 헌금이 전부 현금으로 들어오기에 유동성(liquidity)면에서는 어떤 커다란 재벌기업보다도 좋을 것입니다. 이를 관리하는 분들은 회계사를 위시하여 회계·재무관리에 특별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들인데 그 위에 정직하고 신뢰할 만한 사람들로 임명합니다. 그런데도 때때로 금전을 유용(流用)함으로 또는 지출 내역이 모호하여서 교회에 말썽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 중에 가룟 유다가 일행의 돈궤를 맡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역 초기에 그를 대단히 신뢰하셨는지 아니면 그가 강력하게 재정을 맡겠다고 자청하였는지 그가 혼자 돈을 관리하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 가운데 유지들이 가만히 예수님께 기부금을 내놓았을 것입니다. 이 예수님을 사람들이 메시아라고 하는데 그가 나중에 왕이 되면 한 자리 하려는 마음에서 그리 하였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병 나은 것이 고마워서 얼마를 예수님께 드렸을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예수님은 세어보지도 않으시고 가룟 유다에게 주십니다.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마지막 때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전에 베다니에 들르셨는데,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었다고 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이를 분히 여기는데 그 이유인즉 그가 횡령할 몫이 없어진 까닭입니다. 요한복음 12장 4-6절에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정상 일꾼의 300일치 노임)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감이러라.”고 했습니다.
금전에 대한 욕심이 많은 가룟 유다가 돈궤를 맡은 것이 근본적으로 잘못이었는데, 사단이 그의 탐심을 미혹하여서 예수님을 은전 삼십냥에 팔게 하고 그는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가게 됩니다(요한 13:27 참조).

2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신뢰할 만한 일꾼들--디도와 다른 두 형제를 고린도 교회에 보낸 것에 대해서 언급하는데, 그들을 파견함은 첫째로는 고린도 교회의 모금을 격려하여 이제 완성하기 위함이요, 둘째로는 모금한 돈을 다루고 운반함에 조금도 부정한 것이나 의심받을 만한 일이 없게 하기 위함입니다. 16-17절에서 디도에 관하여, 18-19절에서 다른 형제에 관하여, 22절에 또다른 형제에 관하여 소개하고 있습니다.

16-17절에 “너희를 위하여 같은 간절함을 디도의 마음에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저가 권함을 받고 더욱 간절함으로 자원하여 너희에게 나아갔고”라고 말씀합니다.
모금의 격려와 관리를 위해 파견하는 세 사람 가운데 먼저 디도에 대해서 소개합니다. 디도를 고린도 교회에 보냄은 디도의 마음이,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대한 간절함이 있듯이, 동일한 간절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간절함’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푸데이(σπουδή: earnestness, diligence, eagerness, zeal, effort)는 ‘간절한 바람’, ‘열성’, ‘열심’, ‘노력’, ‘근면함’ 등의 뜻을 갖고 있는데, 여기서는 진정으로 고린도 교인들을 위하고 걱정하는 마음입니다.
바울은 디도의 고린도 교회와 교인들에 대한 간절함이 첫째로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교회와 교우들을 걱정하고, 위하고 기도하고, 사랑하는 마음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마음이란 뜻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다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바쳐지는 사람에게 주십니다.
두 번째로, 디도의 간절함은 바울의 권함을 받아 더욱 간절하여졌다고 했습니다. 목회자와 성도의 관계가 필요합니다. 목회자의 성도를 위한 권면이 그의 교회를 위하는 마음을 더욱 증가시킬 수 있습니다. 또한 성도와 성도간에 교회를 위한 권함과 함께 기도함이 필요합니다. 이로써 성도들은 교회를 더욱더 간절히 사랑하게 됩니다.
세 번째로, 그의 간절함은 자원함으로 표현되어집니다.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고, 봉사하고, 헌신함은 강요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라 하라’ 해서 마지못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억지로 참석한 기도모임이요, 예배요, 봉사이면, 이내 싫증을 느끼고 도망치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원하는 마음으로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고 말씀을 사모하여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분의 일을 감당하고자 할 때, 이 사람에게는 이 모든 일들이 즐겁고, 보람있고, 은혜가 넘칩니다.
디도는 처음에 바울의 지시하는 대로 고린도 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 교회를 보고 나서, 바울의 자랑이 무엇이며 그 교회를 향한 바울의 염려가 무엇인지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자기와는 무관한 고린도 교회이었는데 그 교회를 방문하고 난 지금은 자기도 그 교회에 대한 애정을 갖게 되었으며 바울의 그 교회를 위한 염려와 기도가 그의 염려와 기도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쓰임을 받는 사람에게 생기는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사랑과 간절함입니다.

18-19절에 “또 저와 함께 한 형제를 보내었으니 이 사람은 복음으로서 모든 교회에서 칭찬을 받는 자요 이뿐 아니라 저는 동일한 주의 영광과 우리의 원을 나타내기 위하여 여러 교회의 택함을 입어 우리의 맡은 은혜의 일로 우리와 동행하는 자라.”고 합니다.
두 번째 사람을 소개합니다. “이 사람은 복음으로서 모든 교회에서 칭찬을 받는 자”라고 했습니다. “복음으로서” 칭찬을 받았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잘 나타나 있지 않지만, 아마도 복음을 잘 증거하여서, 혹은 자기를 돌아보지 않고 복음증거에 힘써서, 또는 복음에 합당한 삶을 잘 살아서 칭찬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가 “복음으로서” 칭찬을 받되 “모든 교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마게도냐에서 편지를 쓰고 있음으로 이 “한 형제”는 마게도냐 교회들 중에 한 교회에서 선별한 사람일 것인데 그에 대한 칭찬은 자기의 교회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마게도냐의 모든 교회들--곧, 빌립보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 베뢰아 교회 등--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그는 아마도 마게도냐 교회들 안에서는 그의 복음증거와 복음에 합당한 삶으로 유명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그 형제는 바울이 소아시아에 머물러 있었을 때부터 모금하는 일을 위하여 소아시아의 여러 교회들 중에서 선택을 받은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이 모금의 일을 온전히 이루기 위하여 바울과 동행하여 전도여행을 다녔던 것입니다.
바울이 그의 이름을 거명하여 소개할 수도 있었을 터인데 굳이 이름을 드러내지 않은 것도 그의 원함이었을지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 앞에 이름이 드러나느냐 드러나지 않느냐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인정함을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것을 더 원하였던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은 “여러 교회의 택함을 입어” 바울 일행과 동행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모금의 일을 사사로이 하지 않았습니다. 모금하는 일에 아무런 부정한 것이 없고 투명하게 행하여지게 하기 위해서 여러 교회들이 인정하는 청렴하고 정직한 사람을 선택한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모금의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바울의 원하는 바 가난한 성도를 돕는 일을 온전하고 흠없이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21절에 “이것을 조심함은 우리가 맡은 거액의 연보(捐補)로 인하여 아무도 우리를 훼방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우리가 주 앞에서만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선한 일에 조심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모금하고 모금한 돈을 관리하는 일에 특별히 조심함은 거액의 연보로 인하여서 그의 복음증거가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9장에서도 바울이 원하는 바 복음이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 사역자로서 생활비 청구권까지 포기하겠다는 바울의 의지를 비친 바 있습니다. 9장 11-12절에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복음)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물질)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 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障碍)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고 말씀했습니다.
바울이 여러 지방의 여러 교회들로부터 모금한 돈이 거액이기에 전도와 모금을 위한 여행을 하면서 그는 그 돈을 자신이 관리하지 않고 여러 사람으로 관리하게 하고 모금하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그렇지 않아도 바울을 반대하는 자들이 비방과 중상의 기회를 찾는데, 그들에게 훼방거리를 제공하지 않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주님 앞에서뿐만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도 선한 일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잠언서 기자는 3장 3-4절에서 “인자와 진리로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 판에 새기라.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의 선한 일을 하려고 해도 사람들 앞에서 애매히 고난을 받는 일이 중상을 당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더욱 더 좌절하지 않고 하나님의 선한 일로 사람들 앞에서도 선히 여김을 받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22절에 “또 저희(디도와 한 형제)와 함께 우리의 한 형제를 보내었노니 우리가 여러 가지 일에 그 간절한 것을 여러 번 시험하였거니와 이제 저가 너희를 크게 믿으므로 더욱 간절하니라.”고 했습니다.

세 번째 사람을 소개합니다. 이 사람 또한 참으로 신실한 사람인데 바울은 이 사람이 과연 정직하고 물질을 탐하지 않는 사람인가 여러 면에서 지켜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사람이 과연 모금하는 일과 모금한 연보를 관리하는 일에 적합한 사람이라고 판단되어서 그 일을 감당케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믿음을 단련시키시고 우리가 과연 중심으로부터 하나님의 사람인가 보시기 위해서 우리를 시험하실 때가 있습니다. 이는 우리를 넘어뜨리고자 하심이 아니라 세우기 위함이심이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확실하게 인정하기 위함이심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이 있었지만 그가 하나님의 최종적인 인정함을 얻기 위해서는 어려운 시험을 통과하여야 했습니다. 곧, 자기의 가장 소중한 아들 이삭을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바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최종 시험을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이 판단하건데, 이 사람의 믿음이 과연 하나님의 영광과 가난한 성도들을 위하는 연보를 감당하기에 합당한 형제이므로 바울은 그에게 고린도 교인들이 가난한 성도들을 돕는 연보를 함에 간절함이 있었다고 이야기 해줍니다. 그랬더니, 이 형제도 고린도 교인들의 간절함을 믿고 이 연보를 거두고 관리함으로 가난하고 불쌍한 성도를 돕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더욱 간절함을 표현하였다고 했습니다.

23절에 “디도로 말하면 나의 동무요 너희를 위한 나의 동역자요 우리 형제들로 말하면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파견한 세 사람에 대해서 추천의 요약을 합니다. “디도로 말하면 나의 동무요 너희를 위한 나의 동역자”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디도를 어디에서 처음 알게되었는지 모릅니다. 다만 갈라디아서 2장 3절에서 디도가 헬라인인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디도서 1장 4절에서 바울은 그레데 섬에서 목회를 감당하고 있는 디도를 “나의 참아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디도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그를 돕는 사람이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23절에서는 “나의 동무”, “나의 동역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디도가 그만큼 바울의 신뢰를 받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목회자들에게도 동역자가 필요한 데 그의 어려움을 함께 나누고 함께 교회를 염려할 동무요 동역자를 갖는다는 것은 참으로 커다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다른 두 형제들에 관하여는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라”고 요약합니다. 그들이 여러 교회들 가운데 선택되어 바울의 모금하는 일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일을 함에 무명으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하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이렇게 할 때, 장차 그들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24절에 “그러므로 너희는 여러 교회 앞에서 너희의 사랑과 너희를 대한 우리 자랑의 증거를 저희에게 보이라.”고 당부합니다.
이 세 사람이 고린도 교회에 이르렀을 때 바울이 이들에게 말한 바, ‘고린도 교인들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연보하기를 간절히 사모하였다’는 것이 빈말이 아님을 보이라고 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말로만 모든 일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열매도 있는 사람들인 것을 저들에게 알게 하라는 당부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자랑하였다고 했습니다.
7장 14절에 “내가 그(=디도)에게 너희를 위하여 자랑한 것이 있더라도 부끄럽지 아니하니 우리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다 참된 것같이 디도 앞에서 우리의 자랑한 것도 참되게 되었도다.”고 했습니다.
목회자의 기쁨은 그가 사역한 또는 사역하고 있는 교회의 성도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이 될 때입니다. 이것이 목회의 보람이요 기쁨일 것입니다.
바울이 디도에게 자랑한 바가 헛되지 않고 디도의 보고를 통하여 과연 참되게 되었다고 앞에서 언급한 바울은 이번 모금의 일로도 바울이 디도를 포함한 세 형제에게 한 자랑이 과연 참된 것을 보이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3
오늘 바울은 연보하는 일을 격려하고 모금한 돈을 관리하는 일로 파견한 세 형제에 대하여 언급함으로써, 과연 하나님의 일군의 덕목이 무엇인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꾼에게 하나님의 일을 감당함에 ‘간절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간절함은 하나님과 그의 교회와 성도들을 위하고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이 간절함은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더욱 더 풍성하게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또한 ‘자원함’이 필요합니다. 교회에서의 헌신이나 봉사는 강요되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강청으로 혹은 체면 때문에 마지못해 헌신이나 봉사를 하였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이를 기뻐 받으시지 아니하십니다.
우리의 삶이 복음 증거를 위하여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삶이어야 할 것입니다. 구원받은 자로서 우리가 이 세상 삶을 영위하는 목적은 우리의 복음 증거와 복음에 합당한 삶을 통하여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정직하고, 근면하고, 불의와 부정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복음이 훼방되어지는 많은 원인들 가운데 가장 큰 것이 바로 믿는 사람들의 비윤리적인 삶이 적나라하게 다른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드러나는 까닭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앞에서 또한 사람들 앞에서 우리를 신뢰받을 만한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해서 때로는 우리에게 시험을 주십니다. 우리가 이러한 시험 가운데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우리를 드릴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임을 보일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인정하시며 하나님의 일을 맡기시며 더욱 더 커다란 평강과 축복으로 같이 하십니다.
 

Sunday, November 16, 2014

“평균의 경제원리” (고후 8:7-15)

“평균의 경제원리” (고후 8:7-15)
           
 
  8:7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8     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다른 이들의 간절함을 가지고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코자 함이로다.
     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10   이 일에 내가 뜻만 보이노니 이것은 너희에게 유익함이라. 너희가 일년 전에 행하기를
            먼저 시작할뿐 아니라 원하기도 하였은즉
     11   이제는 행하기를 성취할지니 마음에 원하던 것과 같이 성취하되 있는 대로 하라.
     12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
     13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平均)케
            하려 함이니
     14   이제 너희의 유여(裕餘)한 것으로 저희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저희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하게 하려 함이라.
     15   기록한 것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1
마르크스(Karl Marx, 1818-83)와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95)가 가장 이상적인 경제체제라고 믿었던 공산주의적 사회주의가 동독의 서독으로의 흡수통일, 소비에트연방(USSR)의 붕괴 등으로 무너져 내린 것은 자기 능력을 인정받기 원하고 개인소유를 원하는 인간의 본성에 비추어 아마도 당연한 귀결이었다고 할 것입니다.
어린아이를 키우는 부모는 아이가 말을 하기 시작하는 두 살 전후부터 내 것, 네 것을 구분하는 것을 보게 되고 ‘내 것’에 대한 강한 소유욕을 표현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람들에게는 본능적으로 자기 것을 주장하고 움켜쥐고자 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두세 살에서 시작되는 이 사유욕(私有慾)은 나이가 들어도 줄어들지 않고 죽을 때까지 계속됩니다.
그런데, 능력이 많은 사람이나 능력이 적은 사람이나 능력껏 일하되 동일한 것으로 분배하고 사유를 인정하는 대신에 국가가 모든 것을 소유하는 공산주의는 각 개인에게 그 이상(理想)만큼이나 매력적인 것은 되지 못하였습니다. 열심히 일하여도, 능력이 많아도 동일한 분배를 받는데 능력이 많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더 많은 수확을 거두고자 열심히 일할 사람이 없습니다. 공산주의가 이상적인 제도이긴 했지만 실패한 것은 인간의 본능을 과소평가한 까닭입니다. 국가가 강압적으로 강요한다고 하더라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 반대편에 있는 자본주의의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빈익빈 부익부’(貧益貧富益富)의 사회가 되어간다는 것입니다. 자본주의가 이제까지 등장한 모든 경제체제 중에서 가장 좋은 것임이 사실이지만 이 역시 완전하지 않아서 부자는 점점 부자가 되고 가난한 자는 점점 더 가난한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또 다른 경제체제를 제시합니다. 이 경제체제는 자본주의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교회들을 중심으로 자본주의 체제의 단점들을 보충하여 줍니다. 적어도 같은 교회를 다니는 성도들 간에서는 교회를 통한 (빈부에 대한) 평균화 노력으로 ‘빈익빈 부익부’의 문제를 줄일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예에서 볼 수 있는 공생주의(Commonism)가 바로 그것입니다(행전 2:44-47, 4:32-35). 이것이 공산주의와 다른 것은 각 개인의 능력과 재능에 따른 경영과 소유를 인정하는데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14-30절)에 나오는 달란트의 비유가 그렇습니다. 능력이 있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많은 것을 경영하여 더 많은 것을 이윤으로 남길 수 있고, “자발적으로(voluntarily)", "기쁜 마음으로(joyfully)" 자기의 유여한 것을 적게 남긴 자에게 나누어줍니다.
21세기 현재의 지역교회들도 사도행전에 나오는 자발적 공유의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소유는 그대로 유지하되 자신의 유여한 바를 자발적으로, 기쁜 마음으로 헌금이나 기타의 형태로 교회를 통하여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필요에 따라” 나눠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므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통하여 하기를 원하셨던 나눔의 사역을 감당하게 됩니다.

바울은 우리 믿는 사람들이 “빚진 자”(롬 8:12; 13:8)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빚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빚은 하나님께 진 것인데,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사랑과 은혜의 빚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의) 빚은 곧 주위의 가난한 자들에게 진 빚이라고 말씀합니다. 로마서 15장 25-27절에서,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유대인으로 오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복음)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말씀합니다.
물질적으로 가난하나 영적으로 부요한 자는 영적으로 빈곤한 자에게 영적인 빚을 진 자요, 영적으로 가난하나 물질적으로 부요한 자는 물질적으로 빈곤한 자에게 물질적인 빚을 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은 흔히 ‘나는 가진 게 아무 것도 없어서 나눠줄 것이 없어’라고 말하는데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3장(1-10절)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 기도 시간에 성전에 올라갈 새 미문이라 하는 성전 문에 나면서 앉은뱅이가 구걸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가 그에게 이르기를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말씀할 때, 앉은뱅이는 즉시 일어나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하나님을 찬미하였다고 했습니다.

2
1-6절에서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하여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도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풍성한 연보를 바울에게 전하여준 마게도냐 교회들의 모범적인 헌신에 관하여 언급한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모금의 필요성을 설명합니다.

7절에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작정한 돈을 내라고 강요하거나 명령하는 대신에, 그들의 선한 것에 호소(呼訴)합니다.
“믿음”(고전 13:2)과 “말”과 “지식”(고전 12:8) 등은 고린도 교인들이 갖고 있던 장점들 성령의 은사들입니다. 그 위에 고린도 교인들에게는 (지나치리만큼) 은사들에 대한 간절함이 있었고 바울을 향한 (편지를 쓰고 있는 지금은 다소 빛이 바랜) 사랑함이 있었습니다.
그와 같이 성령의 은사와 사모함과 사랑함에 풍성한 것같이 “이 은혜”--즉,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서 모금하는 일에도 “풍성하게” 하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은혜”가 인색하지 않고 풍성하였던 것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눈에 보이는 형제를 위해서 하는 “이 은혜”에 인색함이 아니라 풍성한 것으로 하라는 당부입니다.

8절에 “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다른 이들의 간절함을 가지고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코자 함이로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명령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함의 표현이 의무감이나 명령으로 되어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만일 그러하다면, 이는 율법주의로 흐르는 것입니다. 교회 봉사하는 일에 자원함이 없다든지, 헌금하는 일에 인색하더라도 구원 그 자체의 문제는 아닙니다.
바울이 마게도냐 교회들의 힘에 지나도록 넘치는 자원함을 언급한 것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헌금을 강요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선한 마음에 호소하여 그들도 하나님의 기쁨과 칭찬의 대상인 것을 확인시켜 주기 위한 것입니다.
모금에 참여하는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그가 내는 돈의 액수가 아니라, 그가 자원하는 마음, 기쁨으로, 주님께 받은 은혜를 돌려드리는 마음으로, 풍성한 마음으로 참여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너희의 사랑이 진실한 것인가 아닌가를 증명하는 것”이라고 바울은 말씀합니다.

9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요하신 자”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자신이 하나님이십니다. 우주만물의 근원이시요, 이를 소유하신 부요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그 자신을 낮추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인간 가운데 거하시기 위하여 가난한 자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육신으로 세상에 오시되, 부유한 왕궁의 왕자로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가난한 목수 요셉과 마리아의 가정에 오실 때, 베들레헴의 한 여관 마굿간의 누추한 곳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의 생애는 가난으로 점철(點綴)된 것이었는데, 그는 공생애기간중 마땅히 누울 아늑한 방 한 칸도 소유하지 않으셨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와 같이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말합니다.
이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이 어떻게 우리로 부요케 합니까?
예수님께서 가난의 옷을 입고 우리에게 오신 것은 이제까지 심령이 가난했던 자이거나, 경제적으로 가난했던 자이거나 간에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을 듣고 이를 받아들이게 하기 위함이심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복음의 말씀을 듣고 그를 주님으로 영접함으로 심령이 부요한 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의 가난으로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하심”이라고 말씀함은 믿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고, 예수님의 가난의 의미를 생각하는 것이 부요해지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난케 되심으로 그를 바라보는 사람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고 기업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구원함을 받고 영생함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부요한 자가 아닙니까? 현재의 우리 모습이 고통스럽고, 헐벗고, 갇히고, 병든 자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천국을 소유한 부요한 자입니다.

10-11절에 “이 일에 내가 뜻만 보이노니 이것은 너희에게 유익함이라. 너희가 일년 전에 행하기를 먼저 시작할 뿐 아니라 원하기도 하였은 즉 이제는 행하기를 성취할지니 마음에 원하던 것과 같이 성취하되 있는 대로 하라.”고 말씀합니다.
부한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이나 대부분 교회를 찾는 주된 목적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더 많이 얻기 위해서인데 성경말씀이 종종 우리에게 부담을 줍니다. 그러나, 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임하는 평안과 기쁨과 감사의 마음이요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서 받을 상급으로 쌓여갑니다(deposit). 하나님의 진정한 축복은 잠시 보이다가 없어져버릴 이 세상에서 일시적으로 누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소망 중에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눈에 보이는 형제·자매들에게 나누어주기를 원합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시점으로부터 일년 전에 고린도 교인들은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는 헌금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늦게 시작한 마게도냐 교회들은 벌써 모금을 완료하였는데 고린도 교회는 아직도 모금이 지지부진한 가운데 있습니다.

이제는 성취할지니 마음에 원하던 것과 같이 성취하되 있는 대로 하라.”고 간곡하게 청합니다.
바울은 답답한 심정이지만 어찌할 수가 없어서 그들의 자발적 의지에 호소할 뿐입니다.

12절에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헌물과 기뻐하시지 않는 헌물의 원형이 아벨과 가인의 제사입니다. 두 제사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아벨의 제사는 구분됨과 정성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담겨 있었던 반면에, 가인의 제사는 구분됨이 없었고 정성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더더욱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과부의 두 렙돈을 칭찬하셨습니까? 이는 그 과부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의 삶의 전부를 드렸기 떄문입니다. 부자에게는 두 렙돈이 하찮은 것이지만, 이 과부에게는 그의 생활비 전부인데 이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드렸기에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연보의 본이 된 것입니다.

13-15절에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平均)케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저희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저희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하게 하려 함이라. 기록한 것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평균(平均)의 경제원리를 설명합니다. 평균의 원리는 우리의 풍요로운 것--유여(裕餘)한 것을 부족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마음입니다. 이리할 때,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부요(富饒)한 것으로 우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줄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믿는 사람들간에 균등화되어 영적으로, 물질적으로 부족한 것이 없는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의 평균의 경제원리의 근거를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광야생활에서 찾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만나를 내려주실 때, 한 사람 몫으로 한 오멜씩을 거두라고 말씀하셨는데(출 16:15-18), “어떤 이는 많이 거두고, 어떤 이는 적게 거두었으나, 그들이 먹을 때에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었고, 적게 거둔 자에게도 부족함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아무도 아침까지 거둔 것을 남겨두지 말라고 했는데, 욕심이 발동하여 혹은 하나님이 그 다음날 만나를 내려주시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불신의 마음으로 모세의 말을 따르지 않고 거둔 만나를 남겨둔 자는 거기에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남을 경험하게 되며 모세의 진노의 대상이 됩니다(출 16:19-20).

장로교의 창시자인 칼뱅(John Calvin, 1509-64)도 바울의 평균의 경제원리를 이어 받았습니다. 칼뱅은 “물질적으로 부한 자는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그의 물질의 풍요를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도록 부르심을 받았고, 영적으로 부한 자는 그리스도의 대리자(vicar of Christ)로서 그의 영의 풍요를 영적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도록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리할 때, 믿는 자의 공동체가운데 영적으로·물질적으로 궁핍함이 없게 됩니다..

3
성경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경제계획(엡 1:9)은 “인간구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되 영적으로뿐만 아니라 물질적으로도 구원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 구원계획을 알게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용하셔서 아직 하나님의 구원에 들지 못한 자를 구원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도 영적으로 뿐만 아니라 물질적으로도 부요한 자의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시는데, 그것은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평균의 경제원리”에 따라서 살 때 가능합니다.
우리의 물질적으로 혹은 영적으로 유여(裕餘)하신 것을 가지고 주위의 물질적으로 영적으로 빈곤한 자를 돌아보고 나눠줌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으로 부요한 자의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