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November 2, 2014

“마게도냐 교회들의 모범” (1) (고후 8:1-6)



           “마게도냐 교회들의 모범” (고후 8:1-6)

           
  8:1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2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3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4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5   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
     6   이러므로 우리가 디도를 권하여 너희 가운데서 시작하였은즉 이 은혜를 그대로 성취케
        하라 하였도다.


                                                                                 1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라”는 말이 있습니다. 돈은 정직하게 노력의 대가로 벌 때 ‘어떻게(=무슨 일을 하여서) 버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무슨 일에) 쓰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일본 성공회 초대주교를 지낸 미국 성공회 소속 선교사 윌리엄스(Channing Moore Williams, 1829-1910)는 자타가 공인하는 매우 지독한 구두쇠였습니다. 단벌의 남루한 차림에다가, 절약하기 위해서 채식을 하고, 편지나 인쇄물의 이면을 글을 쓰기 위한 원고지로 활용하였습니다. 그는 단 한푼도 자신을 위해서 헛트게 쓰는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대단히 인색한 사람이었지만, 화재를 당하여 낭패를 만난 사람을 구제하는 일에는 아낌없이 예금통장을 텁니다. 가난한 고학생이 학비에 쪼들린다는 소리가 들리면 기꺼이 학비를 대줍니다. 교회를 위해 헌금하는 일에 열성이 대단하여 도쿄 삼일대성당, 가네다 성당, 성 요한 성당 등 많은 성당의 건축을 도왔고 학원, 고아원들을 돕는 일에 절약한 돈을 아낌없이 쏟아 부었다고 합니다.

영국 침례교회 소속 풀러(Andrew Fuller, 1754-1815) 목사가 선교기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어느 날 그의 옛 친구 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이보게 풀러, 자네를 보아 내가 5파운드를 헌금하겠네.”라고 말하면서 돈을 건네 주자 풀러 목사는 돈을 되돌려 주면서 말합니다. “아닐세. 나를 보아 이 일에 헌금하는 돈은 결코 받을 수 없네.” 그 친구는 이 말이 그를 나무라는 것임을 눈치챘지만 섭섭해하지 않고 다시 말합니다. “여보게 미안하네. 자네 말이 맞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일이므로 내가 10파운드를 헌금하겠네.” 요즘도 헌금하는 사람들이 체면 때문에 헌금하고, 목사가 마음에 들어 헌금을 많이 하고 목사가 마음에 들지 않아 헌금을 덜 하는 인간적인 모습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헌금드림이나, 예배드림이나, 교회생활은 하나님과의 직접적이고 긴밀한 관계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21세기 교회의 역할이 무엇인지 생각해봅니다.
20세기 한국교회는 한국에 있는 교회든지 미국에 있는 교회든지 거의 대부분이 모으는 교회(collecting church)였습니다. 한 교회만 살찌우는 모습이었습니다. 따라서, 대형교회화함을 자랑합니다. 어느 교회의 숫자가 20,000명이라고 발표되면 이와 경쟁하는 위치에 있는 교회는 숫자를 좀 불려서라도 자기네 교회는 22,000명이라고 발표합니다. 그리고, 그 교회에 속한 교인들이 어떤 신앙의 삶을 사는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발표된 교인의 숫자에 의해서 자신들이 할 일을 다한 줄 생각하고 자랑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랑은 주안에서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랑이 아니라 인간의 기준에 따라 허세를 자랑하는 헛된 자랑입니다. 이러한 교회는 현재 교회건물로도 충분히 예배를 드릴 수 있는데, 경쟁교회보다 더 큰 대형교회건물을 짓는데 대부분의 헌금을 사용합니다. 물론, 교회재정 가운데 전도와 선교계정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전도와 선교비는 말하자면 부스러기에 불과합니다.
“우리 교회는 작은 교회인데 어떻게 전도와 선교에 재정을 할당할 수 있습니까?” 하여 이를 등한시 여기고 이 사명을 위해 기도조차 하지 않고 있을 때, 그 교회는 설령 큰 교회가 된다고 할지라도 이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21세기 교회는 나누어주는 교회(distributing church)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우리에게 보이신 5병2어의 기적은 “하나님의 역사는 나눔에서 나온다”는 진리를 보여주신 기적입니다. 21세기 교회는 20세기의 모으는 교회에서 나누어주는 교회의 모습을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나에게 좀더 시간이 많으면, 교회 일에 열심을 내고 이웃을 돌볼텐데”; “나에게 좀더 재물이 많으면 교회에 십일조도 하고 이웃을 구제할텐데” 말합니다. 하지만, 현재 다소 부족한 듯한 시간과 재물로 봉사하고 구제하고 헌물하지 못한 사람은 앞으로 더 많은 시간과 재물이 생긴다 하더라도 자신을 위하여 쓰지, 주님과 이웃을 위하여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아깝게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100불의 수입이 있을 때, 십일조를 드리기 위하여 10불을 구분하지 못한 사람은, 10,000불의 수입이 있을 때 아까와서 1,000불을 구분할 수 없습니다. 이 사람이 1,000불을 구분하는 일은 그가 변화된 삶을 살게됨으로서만 이루어집니다.

                                                                               2
바울은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구제하기 위한 모금운동을 그의 주요서신인 갈라디아서(2:9-10), 고린도전·후서(고전 16;1-4; 고후 8-9장), 로마서(15:25-28) 모두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그 자신의 생계유지(生計維持)를 위해서는 스스로 “장막을 만드는 일”을 하면서 구차(苟且)하게 손을 내밀지 아니한 그였지만, 예루살렘의 가난에 허덕이며 고통(苦痛)받는 성도들을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나서서, 소아시아와 마게도냐, 아가야 지방의 교회들에 편지하고, 사람들을 보내며 모금(募金)하라고 권면합니다.
예루살렘의 그의 동포들은 그를 배척하고 그에게 여러 가지 어려움을 준 사람들이었지만 로마서 9-11장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의 형제·동포를 사랑하는 마음은 전혀 줄어들지 않습니다.

바울은 그의 생애기간중 3차에 걸친 전도여행을 하는데, 그의 제 3차 전도여행이 사도행전 18장 23절-21장 17절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이 세 번째 전도여행의 목적은 바로 그가 각 교회에 편지하고 사람을 보내어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하여 모금하라고 하여 마련된 돈을 거두어 예루살렘에 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3년여의 기간을 소아시아와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을 두루 돌면서 돈을 모아 예루살렘에 들어갑니다.

바울은 그 스스로는 예수님이 그러하셨듯이,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한 후에는 남은 생애동안 비천(卑賤)과 환난(患難)에 처하는 삶을 살았지만 “부요한 삶”을 산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안 후에 그가 가난과 역경과 핍박의 삶을 살았지만 부요로울 수 있었던 것은, 부요한 자이었으나 가난하게되신 예수님께서 그에게 풍부(豊富)에 처하여도 비천(卑賤)에 처하여도 자족할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을 가르쳐주신 까닭입니다. 해서, 그는 “내게 능력주시는 자(=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고 간증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여 모금을 권면함에 마게도냐 교회들--빌립보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 등--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마게도냐 교인들이 고린도 교인들보다 물질적으로 풍족하여 구제에 적극 참여하고 풍성하게 드렸는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마게도냐 교회들의 헌신적인 구제의 참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따른 행동이었습니다. 9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의 삶의 본이 표혀되어 있는데, 1-5절의 마게도냐 교회들의 모범은 바로 이 본을 그대로 따른 예입니다.

1절에서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로 시작합니다.
그리스도의 인간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로서 되어진 것 같이, 마게도냐 교회들의 예루살렘성도들을 구제함은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은혜”란 말의 헬라어 카리스(χάρις)는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해의 빛’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성도가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구제함은 해의 빛을 받아서 빛을 발할 수 있는 ‘달의 빛’의 은혜라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다고 하면서 이 은혜로서 반사되는 빛을 발하지 못한다면, 이는 아직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지 못한 반증입니다.

2절에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감수하시면서도 인류를 구원하셨는데, 마게도냐 교회의 구제도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9절에 나오는 대로, 예수님은 원래 하나님의 아들로서 천지만물, 온 우주를 소유하시고,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지 않고는 창조된 것이 없는 부요하신 분이셨는데 우리로 그 안에서 부요하게 만들기 위하여 스스로는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마게도냐 교인들도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에게 부요한 삶을 이루기 위하여 극한 가난에서 더 가난하게 되었습니다.

3절에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들을 사랑하실 때 자원하여 그의 목숨까지도 아낌없이 주셨는데, 마게도냐 교회들도 예루살렘의 성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그들의 가진 것을 주었습니다.

4절에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이란 은혜로 표현된 모금한 돈을 가지고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는 “하십시오 하십시오. 합시다 합시다.” 외쳐도 묵묵부답, 아무 반응이 없는데, 빌립보 교회와 데살로니가 교회 등의 마게도냐 지방의 교회들은 스스로 나서서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모금에 동참시켜 달라고 하니 이 얼마나 흐뭇하고 가슴 벅찬 일입니까? 바울의 마게도냐 교회에 대한 자랑과 사랑, 기쁨이 여기에 있습니다.

5절에 “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고 함은 마게도냐 교회들의 모금에의 동참은 바울이 바라던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형편이 어려운 것을 알기에 말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솔선하여 자원하여 그들을 동참케 해달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심은 하나님의 뜻을 좇아 먼저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고 또 우리에게 주신 것인데, 마게도냐 교회들의 구제 또한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준 것”이라고 말합니다. 곧, 우리 믿는 사람의 이웃 사랑함은 우리 자신을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께 바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6절에 “이러므로 우리가 디도를 권하여 너희 가운데서 시작하였은즉 이 은혜를 그대로 성취케 하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디도를 고린도 교회에 파견할 때, 예루살렘 성도들의 극심한 가난의 처지를 설명하고 그들을 돕기 위한 모금을 할 것을 설득하였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이에 동의하고 모금하는 일을 시작하였지만 아직 지지부진한 상태입니다.

이 은혜를 그대로 성취케 하라”고 말씀함은 모금하는 일을 빨리 매듭지으라는 권고의 말씀입니다.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연보함을 “돈”(ἀργύριον, ἄργυρος)이란 단어로 표현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은혜”(χάρις), “자비를 베품” 혹은 “봉사”(διακονία), “친교” 혹은 “교제”(κοινωνία), “풍성한 선물”(εὐλογία), “구제를 위한 선물 혹은 은택”(λειτουργία) 등의 단어들을 사용합니다. 구제 혹은 모금에 참여하는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그가 내는 돈의 액수가 아니라, 그가 자원하는 마음, 기쁨으로, 주님께 받은 은혜를 돌려드리는 마음으로, 풍성한 마음으로 참여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3
마게도냐 교회들이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한 구제에 참여함이 예수님의 삶의 본을 따른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을 소유한 부요하신 분이셨는데 우리에게 부요한 자의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하여 지상으로 내려오셔서 가난하게 되셨다고 바울은 말씀합니다.
이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3절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시고, 누가복음 6장 20절에서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가난의 옷을 입고 우리에게 오신 것은 이제까지 심령이 가난했던 자이거나, 경제적으로 가난했던 자이거나 간에 하나님의 복음을 듣고 이를 받아들이게 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빛을 받게 하기 위함이십니다.

우리는 이전까지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였습니다. 물질적으로는 가난한 자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심령이 매마르고 가난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복음의 말씀을 듣고 그를 주님으로 영접함으로써 심령이 부요한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부요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부요는 세상에서 물질적인 축복과 부를 소유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우리의 부요는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에 속한 것같이 쉬 없어지고 썩어질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전에 걱정하던 세상 것으로 더 이상 염려하거나 근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부요한 백성이 되는 길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확증함으로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5장에서 그 비결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데, 눈에 보이는 헐벗고, 갇히고, 병든 우리 중에 지극히 작은 자를 돌봄이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보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형제와 자매 중에 작은 자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히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고, 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가 보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모든 일을 하는데 실제로는 전혀 돌봄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지만 부요한 삶을 사는 자가 아닙니다. 이러한 사람에 대하여 야고보는 야고보서 2장 16절에서 “너희 중에 누구든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 형제나 자매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라고 반문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부요한 삶은 우리의 가진 것에 여유가 없다고 할지라도 우리보다 더 못한 사람을 생각하고 함께 나눌 때에 가능합니다. “나 먹을 것도 없는데 무엇을 나눕니까?”라고 하는 사람은 그의 현재의 형편에서 나아질 수 없고, 천만금이 생긴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인의 부요한 삶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마게도냐 교회 교인들은 그들의 극한 시련과 가난 가운데서 그들의 가진 것을 아끼지 않고 풍성하게 내어줄 때 그리스도 안에서 부요한 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오병이어로서 5,000명을 먹이시고 열두 바구니를 거두신 예수님의 기적(마태 14:13-21)도 적은 것이지만 함께 떼어서 나눌 때에 이루어졌습니다. 지금도 오병이어의 기적이 나타날 수 있는데, 우리의 가진 바 적은 것이 나 먹기에도 부족하다고 할 것이 아니라, 이를 더 궁핍한 형제·자매들과 나눌 때에 우리는 풍성한 것으로 예비하시고 공급하시는 여호와 이레의 주님의 은혜와 기적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전 20:35)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바로 우리의 부족한 가운데 우리의 가진 것을 떼어서 나누는 마음일 때 그리스도 안에서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혼자만 잘 살겠다고, 혼자만 구원받으면 족하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았다고 입으로는 말하지만, 여전히 가난한 자요 여전히 불쌍한 자입니다.

마게도냐 교회들이 본을 보인 것같이, 우리가 은혜를 나누는 마음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주께 우리 자신을 드리는 마음으로 우리의 가진 바 유여(裕餘)하거나 부족(不足)한 것 중에 일부를 떼어서 나누어줄 수 있을 때에 우리는 우리의 어려운 형편 가운데서 부요한 자요 주님의 축복 안에 거하는 자가 됩니다.
마게도냐 교회들이 다른 교회들의 모범이 된 것같이 우리 교회와 교인들이 모든 교회들의 모범이 되어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아직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까지 부요한 삶을 나누어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바울의 근심함과 기뻐함” (고후 7:5-16)

                           “바울의 근심함과 기뻐함” (고후 7:5-16)
           
 
  7:5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치 못하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라.
     6   그러나 비천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의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7   저의 온 것뿐 아니요 오직 저가 너희에게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고함으로 나로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
     8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9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悔改)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11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12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그 불의 행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그 불의 당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오직 우리를 위한 너희의 간절함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에게 나타나게
        하려 함이로라.
     13  이로 인하여 우리가 위로를 받았고 우리의 받은 위로 위에 디도의 기쁨으로 우리가
        더욱 많이 기뻐함은 그의 마음이 너희 무리를 인하여 안심(安心)함을 얻었음이니라.
     14  내가 그에게 너희를 위하여 자랑한 것이 있더라도 부끄럽지 아니하니 우리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다 참된 것같이 디도 앞에서 우리의 자랑한 것도 참되게 되었도다.
     15  저가 너희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떪으로 자기를 영접하여 순종한 것을 생각하고
        너희를 향하여 그의 심정이 더욱 깊었으니
     16  내가 너희를 인하여 범사에 담대한 고로 기뻐하노라..
 

1
우리 인생들은 일생을 살면서 많은 후회를 반복하면서 살아갑니다. 후회를 통하여서 우리의 삶이 나아질 수만 있다면 그 후회는 값진 것이지만, 지나친 후회가 원망과 좌절과 절망을 동반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을 망하게 할 것입니다.
노루가 사냥군에게 잡히면 배꼽 때문에 잡힌 줄 알고 자기 배꼽을 물어뜯는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서제막급(噬臍莫及)이란 고사성어가 유래하였는데, 이는 ‘배꼽을 물려해도 입이 미치지 못한다’는 뜻으로서, 사람이 배꼽을 깨물려 해도 입에 닿지 않는 노릇이니 아무리 후회해도 이미 때가 늦었음을 비유하는 말입니다.

초(楚)나라 문왕(690-677 BC)이 신(申)나라를 정복하기 위하여 등(鄧)나라를 통과하고자 했습니다. 등나라의 기후(祈候)는 ‘내 조카가 왔다’라고 하면서 문왕을 환대합니다. 그러나 기후의 조카들인 추와 담과 양은 문왕을 죽이자고 간언(諫言)합니다. “저 자는 반드시 등나라를 멸망시킬 것입니다. 만약 빠른 시일 내에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훗날 임금은 배꼽을 물려 해도 입에 미치지 않는 서제막급(噬臍莫及)의 경우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급히 계책을 세우십시오. 지금이 가장 좋은 때입니다.” 기후는 조카들의 충언을 끝내 듣지 않았고, 10년 뒤 초나라 문왕은 등나라를 쳐서 멸망시켰습니다(《春秋左氏傳》「장공(莊公)」편).
우리 인생이 때로는 후회하는 삶을 살 수 있는데, 더욱 큰 후회를 초래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을 늘 돌아보며 하나님의 뜻 안에서 고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2
오늘 본문은 2장(1-13절)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바울은 디도 편에 보냈던 그의 또다른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 중간에 쓴) 편지를 받고 고린도 교인들이 한때 일심으로 전개했던 회개에 대하여 언급함으로 그들이 이번에도 바울의 충고를 받아들여서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모습으로 바로 서기를 바라고 그로 인해 사도와 성도간에 기쁨이 넘치기를 기대해 봅니다.
그 사이(2:1-13과 7:5이하)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권면하는 말을 하는데,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향기’라(2:14-17), ‘그리스도의 편지’라(3:1-3), ‘새 언약의 일군’이라(3:4-18), ‘보배를 담고 있는 질그릇’이라(4:1-15), ‘화목의 사신’이라(5:11-21)고 했습니다.
또한 믿는 사람들은 후패하는 겉사람보다는 날로 새로워지는 속사람에게 더욱 가치를 두어야 할 것인데(4:16-18), 이는 우리의 생명이 이 세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늘 집에 거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5:1-10).
그리스도인의 참모습과 가치를 가르치는 바울에게 임한 환난과 곤고를 언급한(6:1-10) 바울은,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이 지금이라도 마음을 넓히고 활짝 열어 그를 받아들이기를 원한다고 말씀했습니다(6:11-13, 7:2-4).

5절에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치 못하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도행전 19장에 기록된 대로 에베소 지방에서 3년동안 목회를 감당했던 바울과 그 일행에게 심한 핍박이 임할 때 흩어짐을 당하였는데, 그러는 와중에서도 디도는 고린도 교회 문제 해결을 위한 바울의 편지를 갖고 고린도로 향하고, 바울은 잠시 복음의 문이 열린 소아시아 지방의 드로와를 경유하여 마게도냐에 이릅니다. 고린도후서 2장 12-13절에서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주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 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치 못하여 저희를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육체가 편치 못한 것은 핍박하는 무리가 그를 괴롭힌 것 외에 그가 사랑하고 기도하는 고린도 교회로부터 좋은 소식이 날아들지 않아서였습니다.
밖으로는 다툼”이라고 함은 바울의 전도를 훼방하는 유대교에 속한 무리들과 우상숭배자들과의 다툼입니다.
안으로는 두려움”이라고 함은 고린도 교회를 향한 바울의 노심초사(勞心焦思)의 마음이요, 복음증거와 그의 가르침이 방해받지 않기를 바라는 그의 안타까운 심경입니다.

6-7절에 “그러나 비천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의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저의 온 것뿐 아니요 오직 저가 너희에게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고함으로 나로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고 회고합니다.

고린도 교회에 간 디도의 돌아옴이 더디므로 마음이 편치 못했던 바울은 복음의 문이 열려 있던 드로와 지방에서의 전도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마게도냐로 갔습니다(2:12-13). 그러나 디도가 돌아옴에 다툼과 두려움 가운데 놓여 있던 바울은 커다란 위로를 받았습니다.
비천한 자들”(τοὺς ταπεινοὺς)이란 하나님 앞에 낮은 자, 겸손한 자들을 말합니다. 곧, 바울이 환난과 두려움 가운데서도 겸손한 심령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디도를 다시 만나게 허락하시고 그로 인하여서 바울은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디도를 고린도 교회에 파송한 바울은 그가 고린도 교인들에게 봉변이나 당하지 않을까 은근히 걱정이 많았습니다. 만일 그런 경우가 발생한다면, 이는 고린도 교인들이 디도뿐 아니라 바울을 영접치 않음이요 그의 권고를 듣지 않겠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디도의 보고에 의하면, 고린도 교인들은 디도를 따뜻하게 환대하였을 뿐 아니라 바울의 권고의 편지를 받고서 바울에 대한 애틋한 사모의 정과 그들의 잘못을 뉘우치는 애통함을 표현하였다고 했습니다. 물론, 이는 고린도 교회에 거짓 교사들이 들어오기 전의 일입니다. 한때 그들은 몸으로 떨어져있던 바울을 이와 같이 극진하게 받아들인 적이 있습니다.

8절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편지에 대해서 2장 3-4절에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 “내가 이같이 쓴 것은 내가 갈 때에 마땅히 나를 기쁘게 할 자로부터 도리어 근심을 얻을까 염려함이요 또 너희 무리를 대하여 나의 기쁨이 너희 무리의 기쁨인 줄 확신함이로라. 내가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눈물과 사랑으로 쓴 편지이긴 하지만 ‘나무람이 지나쳐서 오히려 그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높은 담을 쌓는 결과를 낳지 않을까?’ 바울은 솔직히 걱정되고 후회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디도의 편에 그들이 뉘우치고 바울의 권면을 따랐다는 반가운 소식을 대하고는 자신의 근심이 기우(杞憂)였음을 알게 됩니다.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고 했는데, 여기 고린도 교인들이 하는 “잠시만의 근심”은 그들이 통상 하던 근심과는 다른 종류의 근심입니다.
8-11절에서 바울은 두 가지 종류의 근심에 대해서 말씀하는데 하나는 ‘세상 근심’이요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의 통상적인 근심은 세상에 속한 것에 대한 세상 근심이었습니다.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 돈벌 것과 출세할 것에 대한 근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잠시만의 근심”은 바울의 편지를 받고 그들의 잘못되었던 행동에 대한 ‘뉘우침의 근심’입니다. ‘우리가 어찌 그런 일을 했나?’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나?’ 등으로 근심하였습니다.

9절에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의 근심의 소식을 접한 바울은 마음이 기쁩니다. 바울의 기쁨은 고린도 교인들이 ‘그들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에 대한 ‘고소(苦笑)한 기쁨’이 아닙니다. ‘지난 번에 내가 너희에게 가서 그렇게 하지 말라, 하지 말라 했는데도 안 듣더니 그것 봐라’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바울이 “지금 기뻐함”은 고린도 교인들이 잘못된 행실을 분히 여기고 회개한 까닭입니다.
19세기의 영국의 시인 브라우닝(R. Browning, 1812-1889)은 “우리의 영혼을 회복시켜주는 최초의 약은 강장제(强壯劑)가 아니라 부식제(腐蝕劑)이며, 즉각적인 확신에 의하여 즉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전에 지은 죄들을 애통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막달라 마리아처럼 그리스도의 머리에 ‘기쁨의 기름’을 붓기 전에 먼저 우리의 슬픔의 눈물로 그리스도의 발을 씻어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오순절날 성령충만하여서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대해서 설교할 때 마음에 찔림을 받은 사람들이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행전 2:37)라고 질문할 때, 베드로는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행전 2:38)고 대답했습니다.
구원을 얻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회개의 역사가 있어야 할 것이며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봄이 있어야 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그들의 잘못된 행실을 어떻게 하면 고칠 수 있나?’고 근심함을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라고 표현합니다.

10절에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근심이라고 번역된 루페(λυπή)는 슬픔(sorrow), 아픔-고통(pain), 걱정-근심(grief) 등 여러 의미를 내포한 것입니다.
세상 근심은 육에 속한 세상사람들과 육신에 속한 유약한 교인들이 하는 것인데 90%이상이 쓸 데 없는 것으로 우리를 육체적으로 병들고 죽게 할 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우리가 믿는 사람이면서도 세상 근심에 지나치게 쌓여있을 때 우리는 이 염려와 근심으로 인해 영생의 축복을 상실할 수도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마태 13장) ‘가시떨기의 밭’을 가진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13장 22절에서 예수님은,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근심은 우리의 마음 밭을 가시떨기로 만들어 말씀의 결실을 거두지 못하게 하고, 해서 우리의 믿음도 자라나지 않습니다. 세상 근심이 지나치면 믿음이 죽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우리로 회개케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잘 감당하지 못함을 근심하고, 말씀대로 살지 못함을 근심(=아퍼하고 슬퍼함)할 때 이는 우리로 우리의 죄를 주님께 자복하게 하고 회개케 한다는 뜻입니다. 회개(悔改)의 역사가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날 때 이는 우리를 구원(救援)에 이르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 4절에서 “애통(哀痛)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시는데, 여기서 “애통하는 자”는 바울이 말씀하는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함을 애통하는 자요, 하나님의 진리를 발견하지 못하여서 애통하는 자입니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위로로 함께 하시어 회개케 하시고 구원을 이루십니다.

11절에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근심”은 우리를 아름답게 변화시킵니다.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삶과 행동도 변화시킵니다. 이러한 근심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간절하게 하고, 변명하게 하고(=자백하게 하고), 분하게 하고(=뉘우치고 한탄하게 하고), (주님을 대함에) 두렵게 하고,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가 되기를) 사모하게 하고, (주님의 일에) 열심 있게 하고, (우리 자신의 잘못을 책망하고) 벌하게 합니다. 이로써 우리 자신이 깨끗하게 됩니다. 우리가 깨끗하게 됨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다 도말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요한 1서 1장 9절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는 사람은 자신의 죄와 허물을 회개할 것이요, 그러므로 깨끗함을 받고 구원함에 이릅니다.

12절에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그 불의 행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그 불의 당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오직 우리를 위한 너희의 간절함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에게 나타나게 하려 함이로라.”고 말씀합니다.
편지의 목적에 대해서는 이미 2장 5-11절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불의 행한 자로 잘못에서 돌이켜 다시는 사단에게 속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적절한 벌을 주는 것은 마땅하지만 처벌이 지나쳐서 아예 교회를 떠나는 일은 없기를 바랐습니다. 불의를 행한 자가 회개하고 불의를 당한 자도 용서함으로 하나님 앞에 더욱 아름다운 관계를 이루어나가기를 원함이었습니다.

13절에 “이로 인하여 우리가 위로를 받았고 우리의 받은 위로 위에 디도의 기쁨으로 우리가 더욱 많이 기뻐함은 그의 마음이 너희 무리를 인하여 안심함을 얻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우리”란 표현을 즐겨 사용하는데 이는 그 자신을 가리킬 때가 많습니다. 여기서도 바울 자신이 받은 위로를 말씀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회개하였다고 함에 위로를 얻었고, 바울의 사자로 간 디도가 고린도 교인들의 후한 대접으로 기뻐하였다고 하니 바울의 기쁨이 더욱 큰 것입니다.
이것이 곤고와 핍박 가운데도 바울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는 목회의 보람입니다.

14절에 “내가 그에게 너희를 위하여 자랑한 것이 있더라도 부끄럽지 아니하니 우리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다 참된 것같이 디도 앞에서 우리의 자랑한 것도 참되게 되었도다.”고 말씀합니다.
디도와 전도여행을 같이 다니면서, 같이 사역하면서 바울은 그에게 종종 고린도 교회와 교인들에 관해서 얘기한 것 같습니다. 때로는 그들의 열심을 자랑하고, 변화를 자랑하고, 사도인 바울의 말을 잘 듣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디도가 고린도 교회와 교인들을 보고 나서 바울의 한 말이 지나친 과장이거나 사실과는 동떨어진 것을 발견하게 된다면 이것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일 것인데, 디도의 보고는 바울이 그들에 관해서 자랑한 것이 사실과 같다고 하니 다시 한 번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로 인하여서 흐뭇하였습니다.

15-16절에 “저가 너희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떪으로 자기를 영접하여 순종한 것을 생각하고 너희를 향하여 그의 심정이 더욱 깊었으니 내가 너희를 인하여 범사에 담대한 고로 기뻐하노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의 대리자로서 고린도 교회를 방문한 디도는 떠나기 전에 고린도 교인들이 어떠한 사람들인가, 그들이 그를 잘 맞을 것이라는 바울의 안심시키는 말을 들었을 것이지만 사실은 조금 불안하였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들을 만나매 디도가 전하여준 바울의 편지를 읽고 그들의 잘못으로 두려워하고 떨고, 또 그를 영접하고 바울을 대하듯이 그에게 순종을 보임으로 마음 속 깊숙한 곳으로부터 그들을 향한 애정이 솟아납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을 사도로 대함이 이와 같았으므로, 바울은 그들을 신뢰한 고로 디도를 파견하고 그의 보고가 과연 그러함으로 기쁨이 컸음을 말씀합니다.
6장 11-13절과 7장 2-4절에서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마음을 넓히고 그와 그의 권고를 받아들이라고 요청하는 바울이 지난 일을 회고함은, 거짓 교사들이 그들에게 들어오기 전, 바울을 그들의 진정한 사도로 여기고 그의 심하게 여겨지는 충고까지도 두렵고 떨림으로 받아들였던 좋았던 관계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7장 4절과 16절에서 말씀한 대로,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담대함, 즉 신뢰함이 여전합니다. 바울이 전에와 같이 지금도 바라는 것은 고린도 교인들의 바울을 향한 신뢰와 받아들임도 여전하여서 바울이 그들을 늘 기쁨과 자랑으로 여기고, 그들로 인하여서 더욱 더 큰 위로를 얻는 것입니다.

3
바울은 디모데후서 1장 7절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라”고 했고,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5장 7절에서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려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1절에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세상의 일로 염려하거나 근심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주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근심이 있는데, 이는 우리를 병들게 하고 죽게 하는 세상 근심이 아니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죄와 허물에서 깨끗하게 될까,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일을 더 잘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어떻게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이웃에게 더 잘 전할 수 있을까, 우리가 어떻게 하면 교회를 부흥시킬까, 어떻게 하면 우리 마음이 뜨거워지고 하나님께 보다 더 헌신할 수 있을까?로 애타하고 걱정하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입니다.

우리가 생활 가운데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계속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서 우리의 작고 큰 잘못들에 대하여 늘 회개하게 되고 성화하는 삶을 살기 위하여 늘 힘 쓸 것이며, 이로써 우리는 날마다 나아지는 모습으로 인하여 우리의 부족을 용납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함으로 기쁨이 충만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