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November 2, 2014

“바울의 근심함과 기뻐함” (고후 7:5-16)

                           “바울의 근심함과 기뻐함” (고후 7:5-16)
           
 
  7:5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치 못하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라.
     6   그러나 비천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의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7   저의 온 것뿐 아니요 오직 저가 너희에게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고함으로 나로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
     8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9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悔改)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11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12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그 불의 행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그 불의 당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오직 우리를 위한 너희의 간절함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에게 나타나게
        하려 함이로라.
     13  이로 인하여 우리가 위로를 받았고 우리의 받은 위로 위에 디도의 기쁨으로 우리가
        더욱 많이 기뻐함은 그의 마음이 너희 무리를 인하여 안심(安心)함을 얻었음이니라.
     14  내가 그에게 너희를 위하여 자랑한 것이 있더라도 부끄럽지 아니하니 우리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다 참된 것같이 디도 앞에서 우리의 자랑한 것도 참되게 되었도다.
     15  저가 너희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떪으로 자기를 영접하여 순종한 것을 생각하고
        너희를 향하여 그의 심정이 더욱 깊었으니
     16  내가 너희를 인하여 범사에 담대한 고로 기뻐하노라..
 

1
우리 인생들은 일생을 살면서 많은 후회를 반복하면서 살아갑니다. 후회를 통하여서 우리의 삶이 나아질 수만 있다면 그 후회는 값진 것이지만, 지나친 후회가 원망과 좌절과 절망을 동반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을 망하게 할 것입니다.
노루가 사냥군에게 잡히면 배꼽 때문에 잡힌 줄 알고 자기 배꼽을 물어뜯는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서제막급(噬臍莫及)이란 고사성어가 유래하였는데, 이는 ‘배꼽을 물려해도 입이 미치지 못한다’는 뜻으로서, 사람이 배꼽을 깨물려 해도 입에 닿지 않는 노릇이니 아무리 후회해도 이미 때가 늦었음을 비유하는 말입니다.

초(楚)나라 문왕(690-677 BC)이 신(申)나라를 정복하기 위하여 등(鄧)나라를 통과하고자 했습니다. 등나라의 기후(祈候)는 ‘내 조카가 왔다’라고 하면서 문왕을 환대합니다. 그러나 기후의 조카들인 추와 담과 양은 문왕을 죽이자고 간언(諫言)합니다. “저 자는 반드시 등나라를 멸망시킬 것입니다. 만약 빠른 시일 내에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훗날 임금은 배꼽을 물려 해도 입에 미치지 않는 서제막급(噬臍莫及)의 경우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급히 계책을 세우십시오. 지금이 가장 좋은 때입니다.” 기후는 조카들의 충언을 끝내 듣지 않았고, 10년 뒤 초나라 문왕은 등나라를 쳐서 멸망시켰습니다(《春秋左氏傳》「장공(莊公)」편).
우리 인생이 때로는 후회하는 삶을 살 수 있는데, 더욱 큰 후회를 초래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을 늘 돌아보며 하나님의 뜻 안에서 고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2
오늘 본문은 2장(1-13절)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바울은 디도 편에 보냈던 그의 또다른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 중간에 쓴) 편지를 받고 고린도 교인들이 한때 일심으로 전개했던 회개에 대하여 언급함으로 그들이 이번에도 바울의 충고를 받아들여서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모습으로 바로 서기를 바라고 그로 인해 사도와 성도간에 기쁨이 넘치기를 기대해 봅니다.
그 사이(2:1-13과 7:5이하)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권면하는 말을 하는데,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향기’라(2:14-17), ‘그리스도의 편지’라(3:1-3), ‘새 언약의 일군’이라(3:4-18), ‘보배를 담고 있는 질그릇’이라(4:1-15), ‘화목의 사신’이라(5:11-21)고 했습니다.
또한 믿는 사람들은 후패하는 겉사람보다는 날로 새로워지는 속사람에게 더욱 가치를 두어야 할 것인데(4:16-18), 이는 우리의 생명이 이 세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늘 집에 거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5:1-10).
그리스도인의 참모습과 가치를 가르치는 바울에게 임한 환난과 곤고를 언급한(6:1-10) 바울은,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이 지금이라도 마음을 넓히고 활짝 열어 그를 받아들이기를 원한다고 말씀했습니다(6:11-13, 7:2-4).

5절에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치 못하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도행전 19장에 기록된 대로 에베소 지방에서 3년동안 목회를 감당했던 바울과 그 일행에게 심한 핍박이 임할 때 흩어짐을 당하였는데, 그러는 와중에서도 디도는 고린도 교회 문제 해결을 위한 바울의 편지를 갖고 고린도로 향하고, 바울은 잠시 복음의 문이 열린 소아시아 지방의 드로와를 경유하여 마게도냐에 이릅니다. 고린도후서 2장 12-13절에서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주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 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치 못하여 저희를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육체가 편치 못한 것은 핍박하는 무리가 그를 괴롭힌 것 외에 그가 사랑하고 기도하는 고린도 교회로부터 좋은 소식이 날아들지 않아서였습니다.
밖으로는 다툼”이라고 함은 바울의 전도를 훼방하는 유대교에 속한 무리들과 우상숭배자들과의 다툼입니다.
안으로는 두려움”이라고 함은 고린도 교회를 향한 바울의 노심초사(勞心焦思)의 마음이요, 복음증거와 그의 가르침이 방해받지 않기를 바라는 그의 안타까운 심경입니다.

6-7절에 “그러나 비천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의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저의 온 것뿐 아니요 오직 저가 너희에게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고함으로 나로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고 회고합니다.

고린도 교회에 간 디도의 돌아옴이 더디므로 마음이 편치 못했던 바울은 복음의 문이 열려 있던 드로와 지방에서의 전도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마게도냐로 갔습니다(2:12-13). 그러나 디도가 돌아옴에 다툼과 두려움 가운데 놓여 있던 바울은 커다란 위로를 받았습니다.
비천한 자들”(τοὺς ταπεινοὺς)이란 하나님 앞에 낮은 자, 겸손한 자들을 말합니다. 곧, 바울이 환난과 두려움 가운데서도 겸손한 심령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디도를 다시 만나게 허락하시고 그로 인하여서 바울은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디도를 고린도 교회에 파송한 바울은 그가 고린도 교인들에게 봉변이나 당하지 않을까 은근히 걱정이 많았습니다. 만일 그런 경우가 발생한다면, 이는 고린도 교인들이 디도뿐 아니라 바울을 영접치 않음이요 그의 권고를 듣지 않겠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디도의 보고에 의하면, 고린도 교인들은 디도를 따뜻하게 환대하였을 뿐 아니라 바울의 권고의 편지를 받고서 바울에 대한 애틋한 사모의 정과 그들의 잘못을 뉘우치는 애통함을 표현하였다고 했습니다. 물론, 이는 고린도 교회에 거짓 교사들이 들어오기 전의 일입니다. 한때 그들은 몸으로 떨어져있던 바울을 이와 같이 극진하게 받아들인 적이 있습니다.

8절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편지에 대해서 2장 3-4절에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 “내가 이같이 쓴 것은 내가 갈 때에 마땅히 나를 기쁘게 할 자로부터 도리어 근심을 얻을까 염려함이요 또 너희 무리를 대하여 나의 기쁨이 너희 무리의 기쁨인 줄 확신함이로라. 내가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눈물과 사랑으로 쓴 편지이긴 하지만 ‘나무람이 지나쳐서 오히려 그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높은 담을 쌓는 결과를 낳지 않을까?’ 바울은 솔직히 걱정되고 후회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디도의 편에 그들이 뉘우치고 바울의 권면을 따랐다는 반가운 소식을 대하고는 자신의 근심이 기우(杞憂)였음을 알게 됩니다.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고 했는데, 여기 고린도 교인들이 하는 “잠시만의 근심”은 그들이 통상 하던 근심과는 다른 종류의 근심입니다.
8-11절에서 바울은 두 가지 종류의 근심에 대해서 말씀하는데 하나는 ‘세상 근심’이요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의 통상적인 근심은 세상에 속한 것에 대한 세상 근심이었습니다.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 돈벌 것과 출세할 것에 대한 근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잠시만의 근심”은 바울의 편지를 받고 그들의 잘못되었던 행동에 대한 ‘뉘우침의 근심’입니다. ‘우리가 어찌 그런 일을 했나?’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나?’ 등으로 근심하였습니다.

9절에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의 근심의 소식을 접한 바울은 마음이 기쁩니다. 바울의 기쁨은 고린도 교인들이 ‘그들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에 대한 ‘고소(苦笑)한 기쁨’이 아닙니다. ‘지난 번에 내가 너희에게 가서 그렇게 하지 말라, 하지 말라 했는데도 안 듣더니 그것 봐라’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바울이 “지금 기뻐함”은 고린도 교인들이 잘못된 행실을 분히 여기고 회개한 까닭입니다.
19세기의 영국의 시인 브라우닝(R. Browning, 1812-1889)은 “우리의 영혼을 회복시켜주는 최초의 약은 강장제(强壯劑)가 아니라 부식제(腐蝕劑)이며, 즉각적인 확신에 의하여 즉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전에 지은 죄들을 애통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막달라 마리아처럼 그리스도의 머리에 ‘기쁨의 기름’을 붓기 전에 먼저 우리의 슬픔의 눈물로 그리스도의 발을 씻어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오순절날 성령충만하여서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대해서 설교할 때 마음에 찔림을 받은 사람들이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행전 2:37)라고 질문할 때, 베드로는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행전 2:38)고 대답했습니다.
구원을 얻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회개의 역사가 있어야 할 것이며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봄이 있어야 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그들의 잘못된 행실을 어떻게 하면 고칠 수 있나?’고 근심함을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라고 표현합니다.

10절에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근심이라고 번역된 루페(λυπή)는 슬픔(sorrow), 아픔-고통(pain), 걱정-근심(grief) 등 여러 의미를 내포한 것입니다.
세상 근심은 육에 속한 세상사람들과 육신에 속한 유약한 교인들이 하는 것인데 90%이상이 쓸 데 없는 것으로 우리를 육체적으로 병들고 죽게 할 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우리가 믿는 사람이면서도 세상 근심에 지나치게 쌓여있을 때 우리는 이 염려와 근심으로 인해 영생의 축복을 상실할 수도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마태 13장) ‘가시떨기의 밭’을 가진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13장 22절에서 예수님은,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근심은 우리의 마음 밭을 가시떨기로 만들어 말씀의 결실을 거두지 못하게 하고, 해서 우리의 믿음도 자라나지 않습니다. 세상 근심이 지나치면 믿음이 죽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우리로 회개케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잘 감당하지 못함을 근심하고, 말씀대로 살지 못함을 근심(=아퍼하고 슬퍼함)할 때 이는 우리로 우리의 죄를 주님께 자복하게 하고 회개케 한다는 뜻입니다. 회개(悔改)의 역사가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날 때 이는 우리를 구원(救援)에 이르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 4절에서 “애통(哀痛)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시는데, 여기서 “애통하는 자”는 바울이 말씀하는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함을 애통하는 자요, 하나님의 진리를 발견하지 못하여서 애통하는 자입니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위로로 함께 하시어 회개케 하시고 구원을 이루십니다.

11절에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근심”은 우리를 아름답게 변화시킵니다.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삶과 행동도 변화시킵니다. 이러한 근심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간절하게 하고, 변명하게 하고(=자백하게 하고), 분하게 하고(=뉘우치고 한탄하게 하고), (주님을 대함에) 두렵게 하고,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가 되기를) 사모하게 하고, (주님의 일에) 열심 있게 하고, (우리 자신의 잘못을 책망하고) 벌하게 합니다. 이로써 우리 자신이 깨끗하게 됩니다. 우리가 깨끗하게 됨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다 도말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요한 1서 1장 9절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는 사람은 자신의 죄와 허물을 회개할 것이요, 그러므로 깨끗함을 받고 구원함에 이릅니다.

12절에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그 불의 행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그 불의 당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오직 우리를 위한 너희의 간절함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에게 나타나게 하려 함이로라.”고 말씀합니다.
편지의 목적에 대해서는 이미 2장 5-11절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불의 행한 자로 잘못에서 돌이켜 다시는 사단에게 속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적절한 벌을 주는 것은 마땅하지만 처벌이 지나쳐서 아예 교회를 떠나는 일은 없기를 바랐습니다. 불의를 행한 자가 회개하고 불의를 당한 자도 용서함으로 하나님 앞에 더욱 아름다운 관계를 이루어나가기를 원함이었습니다.

13절에 “이로 인하여 우리가 위로를 받았고 우리의 받은 위로 위에 디도의 기쁨으로 우리가 더욱 많이 기뻐함은 그의 마음이 너희 무리를 인하여 안심함을 얻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우리”란 표현을 즐겨 사용하는데 이는 그 자신을 가리킬 때가 많습니다. 여기서도 바울 자신이 받은 위로를 말씀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회개하였다고 함에 위로를 얻었고, 바울의 사자로 간 디도가 고린도 교인들의 후한 대접으로 기뻐하였다고 하니 바울의 기쁨이 더욱 큰 것입니다.
이것이 곤고와 핍박 가운데도 바울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는 목회의 보람입니다.

14절에 “내가 그에게 너희를 위하여 자랑한 것이 있더라도 부끄럽지 아니하니 우리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다 참된 것같이 디도 앞에서 우리의 자랑한 것도 참되게 되었도다.”고 말씀합니다.
디도와 전도여행을 같이 다니면서, 같이 사역하면서 바울은 그에게 종종 고린도 교회와 교인들에 관해서 얘기한 것 같습니다. 때로는 그들의 열심을 자랑하고, 변화를 자랑하고, 사도인 바울의 말을 잘 듣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디도가 고린도 교회와 교인들을 보고 나서 바울의 한 말이 지나친 과장이거나 사실과는 동떨어진 것을 발견하게 된다면 이것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일 것인데, 디도의 보고는 바울이 그들에 관해서 자랑한 것이 사실과 같다고 하니 다시 한 번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로 인하여서 흐뭇하였습니다.

15-16절에 “저가 너희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떪으로 자기를 영접하여 순종한 것을 생각하고 너희를 향하여 그의 심정이 더욱 깊었으니 내가 너희를 인하여 범사에 담대한 고로 기뻐하노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의 대리자로서 고린도 교회를 방문한 디도는 떠나기 전에 고린도 교인들이 어떠한 사람들인가, 그들이 그를 잘 맞을 것이라는 바울의 안심시키는 말을 들었을 것이지만 사실은 조금 불안하였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들을 만나매 디도가 전하여준 바울의 편지를 읽고 그들의 잘못으로 두려워하고 떨고, 또 그를 영접하고 바울을 대하듯이 그에게 순종을 보임으로 마음 속 깊숙한 곳으로부터 그들을 향한 애정이 솟아납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을 사도로 대함이 이와 같았으므로, 바울은 그들을 신뢰한 고로 디도를 파견하고 그의 보고가 과연 그러함으로 기쁨이 컸음을 말씀합니다.
6장 11-13절과 7장 2-4절에서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마음을 넓히고 그와 그의 권고를 받아들이라고 요청하는 바울이 지난 일을 회고함은, 거짓 교사들이 그들에게 들어오기 전, 바울을 그들의 진정한 사도로 여기고 그의 심하게 여겨지는 충고까지도 두렵고 떨림으로 받아들였던 좋았던 관계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7장 4절과 16절에서 말씀한 대로,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담대함, 즉 신뢰함이 여전합니다. 바울이 전에와 같이 지금도 바라는 것은 고린도 교인들의 바울을 향한 신뢰와 받아들임도 여전하여서 바울이 그들을 늘 기쁨과 자랑으로 여기고, 그들로 인하여서 더욱 더 큰 위로를 얻는 것입니다.

3
바울은 디모데후서 1장 7절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라”고 했고,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5장 7절에서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려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1절에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세상의 일로 염려하거나 근심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주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근심이 있는데, 이는 우리를 병들게 하고 죽게 하는 세상 근심이 아니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죄와 허물에서 깨끗하게 될까,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일을 더 잘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어떻게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이웃에게 더 잘 전할 수 있을까, 우리가 어떻게 하면 교회를 부흥시킬까, 어떻게 하면 우리 마음이 뜨거워지고 하나님께 보다 더 헌신할 수 있을까?로 애타하고 걱정하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입니다.

우리가 생활 가운데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계속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서 우리의 작고 큰 잘못들에 대하여 늘 회개하게 되고 성화하는 삶을 살기 위하여 늘 힘 쓸 것이며, 이로써 우리는 날마다 나아지는 모습으로 인하여 우리의 부족을 용납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함으로 기쁨이 충만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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