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November 2, 2014

“마게도냐 교회들의 모범” (1) (고후 8:1-6)



           “마게도냐 교회들의 모범” (고후 8:1-6)

           
  8:1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2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3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4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5   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
     6   이러므로 우리가 디도를 권하여 너희 가운데서 시작하였은즉 이 은혜를 그대로 성취케
        하라 하였도다.


                                                                                 1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라”는 말이 있습니다. 돈은 정직하게 노력의 대가로 벌 때 ‘어떻게(=무슨 일을 하여서) 버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무슨 일에) 쓰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일본 성공회 초대주교를 지낸 미국 성공회 소속 선교사 윌리엄스(Channing Moore Williams, 1829-1910)는 자타가 공인하는 매우 지독한 구두쇠였습니다. 단벌의 남루한 차림에다가, 절약하기 위해서 채식을 하고, 편지나 인쇄물의 이면을 글을 쓰기 위한 원고지로 활용하였습니다. 그는 단 한푼도 자신을 위해서 헛트게 쓰는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대단히 인색한 사람이었지만, 화재를 당하여 낭패를 만난 사람을 구제하는 일에는 아낌없이 예금통장을 텁니다. 가난한 고학생이 학비에 쪼들린다는 소리가 들리면 기꺼이 학비를 대줍니다. 교회를 위해 헌금하는 일에 열성이 대단하여 도쿄 삼일대성당, 가네다 성당, 성 요한 성당 등 많은 성당의 건축을 도왔고 학원, 고아원들을 돕는 일에 절약한 돈을 아낌없이 쏟아 부었다고 합니다.

영국 침례교회 소속 풀러(Andrew Fuller, 1754-1815) 목사가 선교기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어느 날 그의 옛 친구 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이보게 풀러, 자네를 보아 내가 5파운드를 헌금하겠네.”라고 말하면서 돈을 건네 주자 풀러 목사는 돈을 되돌려 주면서 말합니다. “아닐세. 나를 보아 이 일에 헌금하는 돈은 결코 받을 수 없네.” 그 친구는 이 말이 그를 나무라는 것임을 눈치챘지만 섭섭해하지 않고 다시 말합니다. “여보게 미안하네. 자네 말이 맞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일이므로 내가 10파운드를 헌금하겠네.” 요즘도 헌금하는 사람들이 체면 때문에 헌금하고, 목사가 마음에 들어 헌금을 많이 하고 목사가 마음에 들지 않아 헌금을 덜 하는 인간적인 모습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헌금드림이나, 예배드림이나, 교회생활은 하나님과의 직접적이고 긴밀한 관계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21세기 교회의 역할이 무엇인지 생각해봅니다.
20세기 한국교회는 한국에 있는 교회든지 미국에 있는 교회든지 거의 대부분이 모으는 교회(collecting church)였습니다. 한 교회만 살찌우는 모습이었습니다. 따라서, 대형교회화함을 자랑합니다. 어느 교회의 숫자가 20,000명이라고 발표되면 이와 경쟁하는 위치에 있는 교회는 숫자를 좀 불려서라도 자기네 교회는 22,000명이라고 발표합니다. 그리고, 그 교회에 속한 교인들이 어떤 신앙의 삶을 사는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발표된 교인의 숫자에 의해서 자신들이 할 일을 다한 줄 생각하고 자랑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랑은 주안에서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랑이 아니라 인간의 기준에 따라 허세를 자랑하는 헛된 자랑입니다. 이러한 교회는 현재 교회건물로도 충분히 예배를 드릴 수 있는데, 경쟁교회보다 더 큰 대형교회건물을 짓는데 대부분의 헌금을 사용합니다. 물론, 교회재정 가운데 전도와 선교계정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전도와 선교비는 말하자면 부스러기에 불과합니다.
“우리 교회는 작은 교회인데 어떻게 전도와 선교에 재정을 할당할 수 있습니까?” 하여 이를 등한시 여기고 이 사명을 위해 기도조차 하지 않고 있을 때, 그 교회는 설령 큰 교회가 된다고 할지라도 이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21세기 교회는 나누어주는 교회(distributing church)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우리에게 보이신 5병2어의 기적은 “하나님의 역사는 나눔에서 나온다”는 진리를 보여주신 기적입니다. 21세기 교회는 20세기의 모으는 교회에서 나누어주는 교회의 모습을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나에게 좀더 시간이 많으면, 교회 일에 열심을 내고 이웃을 돌볼텐데”; “나에게 좀더 재물이 많으면 교회에 십일조도 하고 이웃을 구제할텐데” 말합니다. 하지만, 현재 다소 부족한 듯한 시간과 재물로 봉사하고 구제하고 헌물하지 못한 사람은 앞으로 더 많은 시간과 재물이 생긴다 하더라도 자신을 위하여 쓰지, 주님과 이웃을 위하여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아깝게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100불의 수입이 있을 때, 십일조를 드리기 위하여 10불을 구분하지 못한 사람은, 10,000불의 수입이 있을 때 아까와서 1,000불을 구분할 수 없습니다. 이 사람이 1,000불을 구분하는 일은 그가 변화된 삶을 살게됨으로서만 이루어집니다.

                                                                               2
바울은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구제하기 위한 모금운동을 그의 주요서신인 갈라디아서(2:9-10), 고린도전·후서(고전 16;1-4; 고후 8-9장), 로마서(15:25-28) 모두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그 자신의 생계유지(生計維持)를 위해서는 스스로 “장막을 만드는 일”을 하면서 구차(苟且)하게 손을 내밀지 아니한 그였지만, 예루살렘의 가난에 허덕이며 고통(苦痛)받는 성도들을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나서서, 소아시아와 마게도냐, 아가야 지방의 교회들에 편지하고, 사람들을 보내며 모금(募金)하라고 권면합니다.
예루살렘의 그의 동포들은 그를 배척하고 그에게 여러 가지 어려움을 준 사람들이었지만 로마서 9-11장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의 형제·동포를 사랑하는 마음은 전혀 줄어들지 않습니다.

바울은 그의 생애기간중 3차에 걸친 전도여행을 하는데, 그의 제 3차 전도여행이 사도행전 18장 23절-21장 17절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이 세 번째 전도여행의 목적은 바로 그가 각 교회에 편지하고 사람을 보내어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하여 모금하라고 하여 마련된 돈을 거두어 예루살렘에 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3년여의 기간을 소아시아와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을 두루 돌면서 돈을 모아 예루살렘에 들어갑니다.

바울은 그 스스로는 예수님이 그러하셨듯이,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한 후에는 남은 생애동안 비천(卑賤)과 환난(患難)에 처하는 삶을 살았지만 “부요한 삶”을 산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안 후에 그가 가난과 역경과 핍박의 삶을 살았지만 부요로울 수 있었던 것은, 부요한 자이었으나 가난하게되신 예수님께서 그에게 풍부(豊富)에 처하여도 비천(卑賤)에 처하여도 자족할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을 가르쳐주신 까닭입니다. 해서, 그는 “내게 능력주시는 자(=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고 간증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여 모금을 권면함에 마게도냐 교회들--빌립보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 등--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마게도냐 교인들이 고린도 교인들보다 물질적으로 풍족하여 구제에 적극 참여하고 풍성하게 드렸는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마게도냐 교회들의 헌신적인 구제의 참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따른 행동이었습니다. 9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의 삶의 본이 표혀되어 있는데, 1-5절의 마게도냐 교회들의 모범은 바로 이 본을 그대로 따른 예입니다.

1절에서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로 시작합니다.
그리스도의 인간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로서 되어진 것 같이, 마게도냐 교회들의 예루살렘성도들을 구제함은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은혜”란 말의 헬라어 카리스(χάρις)는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해의 빛’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성도가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구제함은 해의 빛을 받아서 빛을 발할 수 있는 ‘달의 빛’의 은혜라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다고 하면서 이 은혜로서 반사되는 빛을 발하지 못한다면, 이는 아직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지 못한 반증입니다.

2절에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감수하시면서도 인류를 구원하셨는데, 마게도냐 교회의 구제도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9절에 나오는 대로, 예수님은 원래 하나님의 아들로서 천지만물, 온 우주를 소유하시고,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지 않고는 창조된 것이 없는 부요하신 분이셨는데 우리로 그 안에서 부요하게 만들기 위하여 스스로는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마게도냐 교인들도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에게 부요한 삶을 이루기 위하여 극한 가난에서 더 가난하게 되었습니다.

3절에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들을 사랑하실 때 자원하여 그의 목숨까지도 아낌없이 주셨는데, 마게도냐 교회들도 예루살렘의 성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그들의 가진 것을 주었습니다.

4절에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이란 은혜로 표현된 모금한 돈을 가지고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는 “하십시오 하십시오. 합시다 합시다.” 외쳐도 묵묵부답, 아무 반응이 없는데, 빌립보 교회와 데살로니가 교회 등의 마게도냐 지방의 교회들은 스스로 나서서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모금에 동참시켜 달라고 하니 이 얼마나 흐뭇하고 가슴 벅찬 일입니까? 바울의 마게도냐 교회에 대한 자랑과 사랑, 기쁨이 여기에 있습니다.

5절에 “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고 함은 마게도냐 교회들의 모금에의 동참은 바울이 바라던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형편이 어려운 것을 알기에 말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솔선하여 자원하여 그들을 동참케 해달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심은 하나님의 뜻을 좇아 먼저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고 또 우리에게 주신 것인데, 마게도냐 교회들의 구제 또한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준 것”이라고 말합니다. 곧, 우리 믿는 사람의 이웃 사랑함은 우리 자신을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께 바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6절에 “이러므로 우리가 디도를 권하여 너희 가운데서 시작하였은즉 이 은혜를 그대로 성취케 하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디도를 고린도 교회에 파견할 때, 예루살렘 성도들의 극심한 가난의 처지를 설명하고 그들을 돕기 위한 모금을 할 것을 설득하였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이에 동의하고 모금하는 일을 시작하였지만 아직 지지부진한 상태입니다.

이 은혜를 그대로 성취케 하라”고 말씀함은 모금하는 일을 빨리 매듭지으라는 권고의 말씀입니다.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연보함을 “돈”(ἀργύριον, ἄργυρος)이란 단어로 표현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은혜”(χάρις), “자비를 베품” 혹은 “봉사”(διακονία), “친교” 혹은 “교제”(κοινωνία), “풍성한 선물”(εὐλογία), “구제를 위한 선물 혹은 은택”(λειτουργία) 등의 단어들을 사용합니다. 구제 혹은 모금에 참여하는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그가 내는 돈의 액수가 아니라, 그가 자원하는 마음, 기쁨으로, 주님께 받은 은혜를 돌려드리는 마음으로, 풍성한 마음으로 참여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3
마게도냐 교회들이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한 구제에 참여함이 예수님의 삶의 본을 따른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을 소유한 부요하신 분이셨는데 우리에게 부요한 자의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하여 지상으로 내려오셔서 가난하게 되셨다고 바울은 말씀합니다.
이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3절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시고, 누가복음 6장 20절에서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가난의 옷을 입고 우리에게 오신 것은 이제까지 심령이 가난했던 자이거나, 경제적으로 가난했던 자이거나 간에 하나님의 복음을 듣고 이를 받아들이게 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빛을 받게 하기 위함이십니다.

우리는 이전까지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였습니다. 물질적으로는 가난한 자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심령이 매마르고 가난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복음의 말씀을 듣고 그를 주님으로 영접함으로써 심령이 부요한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부요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부요는 세상에서 물질적인 축복과 부를 소유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우리의 부요는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에 속한 것같이 쉬 없어지고 썩어질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전에 걱정하던 세상 것으로 더 이상 염려하거나 근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부요한 백성이 되는 길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확증함으로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5장에서 그 비결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데, 눈에 보이는 헐벗고, 갇히고, 병든 우리 중에 지극히 작은 자를 돌봄이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보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형제와 자매 중에 작은 자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히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고, 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가 보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모든 일을 하는데 실제로는 전혀 돌봄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지만 부요한 삶을 사는 자가 아닙니다. 이러한 사람에 대하여 야고보는 야고보서 2장 16절에서 “너희 중에 누구든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 형제나 자매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라고 반문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부요한 삶은 우리의 가진 것에 여유가 없다고 할지라도 우리보다 더 못한 사람을 생각하고 함께 나눌 때에 가능합니다. “나 먹을 것도 없는데 무엇을 나눕니까?”라고 하는 사람은 그의 현재의 형편에서 나아질 수 없고, 천만금이 생긴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인의 부요한 삶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마게도냐 교회 교인들은 그들의 극한 시련과 가난 가운데서 그들의 가진 것을 아끼지 않고 풍성하게 내어줄 때 그리스도 안에서 부요한 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오병이어로서 5,000명을 먹이시고 열두 바구니를 거두신 예수님의 기적(마태 14:13-21)도 적은 것이지만 함께 떼어서 나눌 때에 이루어졌습니다. 지금도 오병이어의 기적이 나타날 수 있는데, 우리의 가진 바 적은 것이 나 먹기에도 부족하다고 할 것이 아니라, 이를 더 궁핍한 형제·자매들과 나눌 때에 우리는 풍성한 것으로 예비하시고 공급하시는 여호와 이레의 주님의 은혜와 기적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전 20:35)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바로 우리의 부족한 가운데 우리의 가진 것을 떼어서 나누는 마음일 때 그리스도 안에서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혼자만 잘 살겠다고, 혼자만 구원받으면 족하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았다고 입으로는 말하지만, 여전히 가난한 자요 여전히 불쌍한 자입니다.

마게도냐 교회들이 본을 보인 것같이, 우리가 은혜를 나누는 마음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주께 우리 자신을 드리는 마음으로 우리의 가진 바 유여(裕餘)하거나 부족(不足)한 것 중에 일부를 떼어서 나누어줄 수 있을 때에 우리는 우리의 어려운 형편 가운데서 부요한 자요 주님의 축복 안에 거하는 자가 됩니다.
마게도냐 교회들이 다른 교회들의 모범이 된 것같이 우리 교회와 교인들이 모든 교회들의 모범이 되어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아직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까지 부요한 삶을 나누어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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