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March 29, 2014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 (고전 4:1-5)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 (고전 4:1-5)
           
 
  4:1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忠誠)이니라.
     3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4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1
무용지물(無用之物)이란 말은 쓸모없는 물건이란 뜻입니다. 아무 재주와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자신을 비하(卑下)하여서 ‘나는 무용지물(無用之物)이야’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틀린 생각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과신할 때는 하나님의 일을 함에 전혀 무용(無用)한--필요없는 사람이었는데, 몸이 불구가 된 다음에 오히려 주님의 일을 함에 유용(有用)한--참으로 필요한 사람이 된 예를 더러 봅니다.
성한 눈을 갖고있을 때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아무 일을 하지 않다가 맹인이 된 다음에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 밝음을 찾고 육신의 눈먼 사람들을 위한 복음의 증거자가 된 안요한목사님의 예와, 두 손과 한 발을 절단당하는 절망을 이기고 한 발만으로 오똑 서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정근자 전도사님의 예와, 젊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감동을 주는 복음성가의 작사·작곡을 하는 뇌성마비의 불구자 송명희씨의 예 등에서 하나님은 그의 자녀 한 사람 한 사람을 다 선하신 뜻대로 사용하는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용하심은 무용지용(無用之用)--쓸모없는 것의 쓸모있음--이란 고사성어의 뜻과도 상통합니다(장자의 인간세편). 초나라의 접여(接輿)라고 하는 사람의 외침 가운데, “산의 나무는 스스로 베이도록 자라고, 등의 기름은 스스로를 태우며, 계피는 먹을 수 있기 때문에 베어지고, 옻은 칠할 수 있기에 그 나무가 베어지니, 사람들이 모두 쓸모있는 것의 쓰임을 알 뿐이며 ‘쓸모없는 것의 쓸모있음’(無用之用)은 모르는구나”고 했습니다. 자기 자신을 포함한 사람들의 눈에 보기에, 세상적인 유용성만을 따진다면 쓸모없는 것같이 보이는 것도 도(道)의 이치로 보면 쓸모 없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노마지지(老馬之智)란 고사성어가 있습니다(한비자 세림편).
‘늙은 말의 지혜’란 뜻인데, 아무리 하찮게 보이는 사람이라도 그 나름대로 독특한 지혜와 재능이 있다는 것입니다.
춘추시대 때 제나라의 명재상 관중과 대부 습붕(濕朋)이 환공을 따라 고죽국(孤竹國)을 정벌하러 갔습니다. 갈 때는 봄이었는데 올 때는 겨울이라서 악천후 속에 그만 길을 잃고 맙니다. 모두가 길을 찾으려고 우왕좌왕할 때 관중이 말합니다: “이럴 때에는 늙은 말의 지혜(老馬之智)가 필요하다.” 늙은 말은 본능적으로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입니다. 과연 늙은 말을 풀어놓고 그 뒤를 따라가니 마침내 길을 찾았다고 합니다.
또 산 속을 가다가 물이 떨어져 갈증으로 심한 고생을 하게 되었는데, 아무리 뒤져도 시냇물이나 작은 샘조차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이때 습붕이 말합니다: “개미는 겨울에 산 남쪽에 집을 짓고, 여름에는 산 북쪽에 집을 짓는다. 개미집이 있는 곳에서 지하 여덟 자를 파면 물이 나올 것이다.” 일행은 개미집을 찾아내 땅을 팠는데, 정말 물이 나왔습니다.
늙은 말이나 개미같이 별로 쓸모 없는 것으로 보이는 존재에게도 지혜가 있으며 재주가 있다는 것입니다.

2
1절에서 바울은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일군”이라고 했습니다. 일군에 해당하는 헬라어, 후페레테스[ὑπηρέτης]는 원래 노예 중에서도 가장 천한 ‘배 밑창에서 노젓는 자’입니다. 그의 하는 일이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도 않고, 귀한 것으로 여겨지기는커녕 가장 천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 사람들이 노를 젓지 않으면 배가 갈 수 없는데도 그들의 하는 일은 비천한 것으로 취급될 뿐입니다.
잘했다고 칭찬 받기보다는 왜 빨리 노를 젓지 못하느냐고 욕설과 함께 채찍이 가해질 뿐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하는 일을 배 밑창에서 노를 젓는 일에 비유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섭섭해 할 것도 아니요, 그 정도밖에 못하냐고 욕을 하고 채찍질하더라도 그저 자신의 달란트와 능력의 한도(限度) 안에서 성심껏 감당합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οίκονόμοι μυστηρίων θεού)”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비밀’이란 ‘하나님의 복음’으로 ‘하나님의 인간구원 계획’입니다.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신다는 축복의 메시지입니다. 이것보다 더 복이 되는 소식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맡은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이코노모스[οίκονόμος]는 이코노미스트(economist) 즉, 경제인 혹은 경영인이란 뜻입니다. 복음서에서는 집주인의 일을 맡은 자와 관련하여 청지기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과 관련해서는 ‘복음증거 사명을 맡은 자’가 됩니다.
따라서, 바울이 자신을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복음--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인간구원 계획을 알리는 복음증거자’란 뜻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증거 사명을 맡은 자’로서 바울은 그의 삶에서 오직 두 가지--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이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밖에 그가 하는 텐트메이커(tent-maker)의 일은 그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할뿐입니다.

2절에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πιστός]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목사님들이 성도님들에게 설교할 때나 성경공부할 때나 또 기회를 얻어서 ‘하나님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봉사하시고 충성하십시오’ 말합니다. 그 말씀을 듣는 성도는 답답합니다. 아니, 나에게 노래 부를 줄 아는 재능이 없고, 아이들 가르쳐본 경험이 없는데 무슨 일로 봉사하고 충성하란 말인가? 혹은 이 교회는 별로 할 일도 없는데. 저 목사님, 참 답답한 말씀 하네‘ 속으로 말합니다.
하나님의 가장 첫 번째 일은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주위에 한국 사람이 없으면, 다른 인종의 사람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것도 맡은 자의 일입니다.
가난한 자를 돌보는 것도, 갇힌 자와 병든 자를 방문하는 것도, 목마른 자에게 물을 마시게 하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는 것과 함께 맡은 자의 할 일입니다.
목사님이 왜 그것밖에 못하냐고 잔소리를 하건, 다른 사람이 일을 하지 않는다고 비난하건, 일을 안하는 사람이 그것도 일이라고 하는 거냐고 빈정거리건, 나의 하는 일이 사람에게 보이건 안보이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하는 모든 일이 맡은 자가 할 일이요 하고있는 일입니다.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이 ‘충성’이라고 했는데, 원어를 직역하면, “맡은 자들은 신뢰할만한 자(=믿을만한 자)로 발견되어져야 한다”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일을 맡겼는데, 그 사람이 하라는 일은 않고 갑자기 배탈이 나서 못했다고 변명만 늘어놓습니다. 또 일을 시켰는데, 이번에는 갑자기 누가 찾아와서 못했다고 변명합니다. 세 번째 일을 부탁했더니, 이번에는 노골적으로 미안한 표정도 없이 별로 하고싶지 않아서 안했다고 대답합니다. 이 사람이 주인에게는 별로 신뢰할만한 사람이 못됩니다.

예수님의 달란트의 비유에서, 주인되신 하나님을 위해서 경영을 전혀 하지 않은 한 달란트를 맡은 자의 변명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25장 24-25절에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람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고 했습니다. 과연, 이 게으른 종의 주인으로 비유된 하나님이 굳은 분이셨습니까? 태만한 사람들은 자기의 게을러 하지 못한 일의 결과를 어떠한 형태로든지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키기를 원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맡은 일을 하지 않은 사람의 변명이 매번 그럴듯하게 들리더라도, 이 사람은 신뢰할만한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맡은 자로서, 감당하는 사람으로서 ‘신뢰할만한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3절에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라고 말씀합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나귀’의 우화(寓話)를 우리가 압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장에서 나귀 한 마리를 사서 집으로 끌고갑니다.
길가에 있던 사람들이 이 모습을 보면서, “원 저렇게 미련스럽기는. 나귀를 끌고갈 바에는 타고 가지” 말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이 말을 듣고, 아버지가 나귀의 등에 타고, 아들은 나귀 옆에서 갑니다.
얼마쯤 가니, 아낙네들의 무리가 나귀의 등에 탄 아버지와 그 옆에서 걸어가는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를 욕합니다: “저런 인정머리 없는 사람같으니. 아들은 걸리고 지는 타고 가다니.” 나귀에 타고 가던 아버지가 그렇지 않아도 아들을 걷게 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는데 이 말을 듣고는, 자기는 내리고 아들을 태웁니다. 얼마쯤 가는데, 이번에는 노인들의 무리를 만납니다. 이들도 한마디씩 합니다: “저런 몹쓸일이 있나. 저기는 위아래도 없나. 장유유서(長幼有序)인데, 아들은 떡허니 나귀에 타고 가고 나이든 아버지는 걸어가다니.”
이 말을 듣고는 그도 그런 것 같아, 이번에는 둘이 다 나귀의 등에 올라탑니다.
또 얼마쯤 가는데, 사람들이 한 마디씩 합니다: “아유 저런 고약한 사람들이 있나? 말 못하는 짐승이라고 저렇게 학대하다니?” 그 사람들의 말을 들으니 그런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아버지와 아들이 막대기와 밧줄을 사용하여 나귀를 메고 갑니다. 이 광경을 바라보는 아이들이 깔깔대고 웃습니다. “야 저 사람들 좀 봐라. 나귀는 타는 짐승인데, 저렇게 메고 가네. 아이고 우스워”하고 놀리며 따라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이래도 뭐라고 하고 저래도 뭐라고 하는 사람들의 말에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교인들 중에는 하나님의 일을 하고는 싶은데,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서 주저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차라리, 일을 안 하면 아무 소리도 듣지 않는데, 교회에서 무슨 일이라도 할라치면, 무엇이 이렇다 무엇이 저렇다 뒤에서 말들을 많이 합니다. 또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욕까지 먹습니다. 그러나, 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욕을 하는 사람이 잘못된 것이지 욕을 먹는 사람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허락하신 것이 그 정도의 것이면, 그것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나의 재능과 달란트의 많고 적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내 자신에게 허락되어진 것을 드리고자 하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바울이 지금은 위대한 사도로 여겨지지만, 당시에는 합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뿐아니라, 그를 비방하고 대적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고린도전서를 비롯한 그의 서신들에서도 볼 수 있지만, 그가 개척하고 정열을 쏟은 교회에서조차도 그를 중상하고 폄하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가 무슨 그리스도의 사도냐? 그가 언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고 복음을 증거하느냐? 그의 설교가 왜 그렇게 형편없느냐? 그가 말은 많이 하는데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가 말하는 복음은 잘못된 것이고 바른 것은 이러하다’는 등 각 교회에서 그가 머물러있을 때나 떠나있을 때나 반대하는 사람의 비난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어떤 특정한 인물이 그를 못살게 굽니다. 디모데후서 4장 14절에서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 표현함으로 바울이 이 사람으로 말미암아 얼마나 고통을 당하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일을 하되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소신껏 하기에, 다른 사람들이 그와 그의 하는 일을 두고 이렇쿵 저러쿵 하는 일을 작은 일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비난만을 작은 일로 여길뿐아니라, 자기도 자신의 하는 일을 자책(自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왜 내가 하는 일은 요모양 요꼴이지? 왜 내게 더 큰 달란트가 없어서 큰 결실을 거두지 못하지? 왜 열심히 일했는데도 성과가 없지?’ 자책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무를 자라나게 하고, 열매를 맺게하는 일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할 일은 다만 맡겨진 일을 나의 믿음의 분량 안에서 열심히 감당할뿐입니다.

4절에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시는 이는 주시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고 한 말씀은 바울이 흠이 없고 티가 없는 완전하고 의로운 사람이라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허락되어진 여건 가운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복음을 증거하는데 열정을 쏟은 까닭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을 위해서 한 일을 판단하실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하는 일이 ‘착하고 충성되다’ 아니면 ‘악하고 게으르다’고 판단하실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목회자의 하는 일을 놓고 가타-부타 합니다. 그런가 하면, 성도의 하는 일을 놓고, 어쩌니 저쩌니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사람의 판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는 우리의 하는 일이 종국에 하나님의 판단하심을 받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서 바울은,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강조합니다. 사람들 눈에 뜨이고 사람들이 알아준다고 하여 나의 하는 일이 하나님을 더 기쁘시게 하는 일이 아닐 수 있고, 사람들 눈에 뜨이지않고 사람들이 알아주기는커녕 비난한다고 하여 나의 일이 하나님을 덜 기쁘시게 하는 일이 아닐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일을 충성하는 마음으로 기쁨으로 감당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5절에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삶을 판단하실 때가 올 것인데, 그때까지 다른 사람의 일이 이러쿵 저러쿵 판단할 것도 아니요 다른 사람이 나를 판단하고 비방한다고 하여서 낙담할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마음 중심이 어떠한지를 정확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주님께서 우리를 판단하실 때, 지금은 불분명한 것 같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사람의 마음의 중심과 그의 한 일들을 나타내시어 칭찬을 받을 자에게는 칭찬을 주실 것입니다.

3
자신을 과소평가하십니까? 하나님을 위한 일을 하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의 각각 다른 모양과 다른 재능으로 누구나 다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판단과 욕함이 두려워서 하나님의 일 하기를 주저하십니까? 판단하실 이는 우리의 마음 중심을 아시는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일을 기쁨으로 감당하고, 이왕에 할 바에는 충성된--신뢰할만한 성도로 하나님께 발견되어지시기를 축원합니다.
 
 

Sunday, March 23, 2014

“세상 지혜의 헛됨” (고전 3:18-23)

“세상 지혜의 헛됨” (고전 3:18-23)
           
 
  3:18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19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니 기록된 바 지혜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20   또 주께서 지혜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21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22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 것이요
     23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1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성급하고 요령 위주의 세상의 지혜로 살아갑니다. 이렇게 살아가면 항상 망하는 것이 기정사실이라면 그러한 삶의 방식을 포기할 터인데, 그렇지 않고 그렇게 요령과 성급함으로 살아가더라도 사고가 터지거나 잘못된 확율은 5-10%가 채 될까말까입니다. 한 마디로 재수가 없어서 사고가 나는 것이지 요령을 피워서 사고가 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을 그냥 그렇게 살아갑니다. 사고가 났을 때, 그 사고 원인의 당사자를 비난하지만, 그 비난하는 사람들도 사실은 그 모양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유치원 원장과 교사들은 많은 어린이들이 죽은 맞은 편 방에서 술이 곁들인 밤참을 들고 있었다는데, 약간의 술과 밤참을 먹은 것이야 뭐 잘못이겠습니까? 그런데, 아이들이 밤늦게 돌아다녀 이들을 단속해야하는 귀찮음을 면하기 위하여 아이들이 자고 있는 방문들을 밖에서 잠근 것은 아무래도 곱게 봐줄 수가 없는 사안입니다. 

하나님께 나와서 머리숙여 기도하고 예배드리며,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자 성경을 읽고 말씀을 듣는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지혜는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미련하게 보인다고 했는데,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서 이 세상을 사는 성도들의 삶은 하나님의 지혜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많은 경우에 세상 사람과 별반 다름이 없는 삶입니다.  영의 귀를 막고 영의 눈을 가리고 ‘아웅’ 하면서, ‘내 귀를 막았으니까 하나님께서 나의 속이는 목소리를 듣지 못하시겠지,’ ‘내 눈을 가렸으니까 나의 부정한 모습을 보지 못하시겠지’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나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는다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습을 모르십니까? 

  2
18절에서 바울은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고 말씀합니다.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고 함은 “지혜가 없으면서 지혜 있는 척 하지말라”는 것입니다.하나님 앞에 참 지혜는 하나님을 알고, 믿고, 순종하고, 의지하고 겸손한 것인데, 세상에서 지혜 있다고 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사람이기보다는 자신을 의지하고자 합니다. 

잠언 기자는 3장 5-7절에서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依賴)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고 말씀합니다. 
‘스스로 지혜롭다’ 하는 자는 자기의 명철을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자이며, 따라서 자고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을 떠난 삶, 말씀에서 멀어진 삶이 성경에서는 악이요 죄입니다. 

이사야서 5장 21절은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그들은 화 있을진저”라고 말씀합니다. 
“나는 지혜롭다, 나는 명철하다”고 하는 자는 화가 있다고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사람은 비록 교회를 출석한다고 하더라도, 그가 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자기의 지식으로 삼고 그 말씀을 자기의 생각으로 판단하기 위함입니다. 

사람들이 흔히 자신이 지혜 있는 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지혜는 하나님의 편에서 보실 때, 요령이요 간계이지 하나님의 지혜는 아닙니다. 세상의 학문을 많이 하였다고 지혜가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학문을 많이 한 사람에게 지식은 있을지언정, 하나님을 아는 지혜는 없을 수 있습니다. 지식 있는 자가 자기의 지식을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고 겸손히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그 말씀대로 살고자 할 때 이 사람은 지혜로운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지혜는 자기를 내세우고 자기를 자랑하게 하지만, 하나님의 지혜는 자기를 낮추고 하나님을 나타냅니다. 왜냐하면 지혜의 근본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는 대적이 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창세기 3장 1절에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 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고 했습니다. 긴교한 지혜의 소유자 뱀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심을 받은 아담과 이브를 넘어뜨리고자 함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대적하는 일입니다. 믿는 사람들에게 늘 속삭입니다: “야, 너만 그렇게 살면 뭐해? 그렇다고 누가 널 알아주기라도 하냐? 남들 하는 대로 해. 적당히 요령도 피우고, 적당히 속이기도 하며 살아. 다 그렇게 사는거야. 이 세상에서 잘되는 사람들 좀 봐. 너처럼 미련하게 사는 사람이 있나.” 

19절에 “이 세상의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니 기록된 바(욥 5:13)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궤휼(詭譎)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했습니다. 세상의 지혜--이 세상 임금인 사단에게 속한 지혜로는 하나님을 깨달아 알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부인하거나 과소평가하게 합니다. 또한, 하나님에 대해서 제멋대로 지껄이게 합니다. 창조자 하나님을 인정치 않고, 멀리 하게 하여, 결국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게 하는 그 세상 지혜는 참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미련한 것입니다. 세상 지혜가 있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때, “만일 하나님이 사랑이시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내가 하나님을 모른다고 해도,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있다고 해도 구원해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을 인정치 않는다고 지옥으로 보내시는 그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아니면 성경이 엉터리이든지. 인간의 지혜와 논리로서는 일리가 있다고 하겠으나,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그 마음에 있는데도, 하나님이 그 사람의 일생을 통하여 부르심에도 그 음성 듣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스스로 거부한 사람이요, 사단의 미혹의 영의 지배를 받아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고 했습니다. 스스로 지혜 있다고 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모든 일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므로,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없어도 좋다고 하는 삶을 살아가는데, 이는 사단이 지극히 바라는 바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기 쉽습니다. 사단이 세상의 권세와 명예를 줄테니까 절하라고 하면 절을 할 사람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겸손한 마음으로 교회생활을 하던 사람이 조금 믿음이 생기고 은사를 받게 되면 자기의 모든 하는 일들이 자기 믿음이 좋아서 된 줄로 알고 으시댑니다. 이때 이 사람의 교만한 마음을 사단이 미혹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대신에 자기 자신을 높이는 일에 사용하게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 하나님께 속했던 사람을 하나님과 원수 만들게 할 수만 있다면, 이것이 바로 사단이 바라던 바입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을 믿지않던 사람을 제 편으로 넣는 것은 시시한 일이나 하나님의 귀히 쓰임을 받던 사람을 자기 수하에 넣는 일은 참으로 통쾌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혼란스러운 것이 자기를 높이는 이 사람--지금은 사단의 궤휼에 빠져있는 이 사람에게 여전히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병이 낫고 앞날을 내다보는 예언이 이 사람에게도 나타납니다. 클레멘트 위경문학(pseudo-Clementine Homilies와 Recognition)에 보면 성령의 능력을 돈을 주고 사려했다가 베드로에게 혼이 난 마술사 시몬이 하나님을 자처하면서 베드로와 한판 승부를 벌이는데, 이와같은 능력과 이적이 세상의 지혜를 자랑하는 자에게도 나타납니다. 그러나, 자기를 자랑하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능력은 결국 그를 궤휼에 빠지게 하고 멸망을 당하게 합니다. 

욥기 5장 12-14절에 “하나님은 궤휼한 자의 계교를 파하사 그 손으로 하는 일을 이루지 못하게 하시며 간교한 자로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시며 사특한 자의 계교를 패하게 하시므로 그들은 낮에도 캄캄함을 만나고 대낮에도 더듬기를 밤돠 같이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20절에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고 말씀합니다.  스스로 지혜 있다고 하는 사람들의 생각은 잠시잠간이면 지나가버릴 이 세상에 머물러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지혜는 하나님 보시기에 헛된 것입니다.  시편 94편 11절에서 “여호와께서 사람의 생각이 허무(虛無)함을 아시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이 그들의 지혜로 생각한다는 것이 결국은 허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를 소유한 사람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바라보기 때문에 허무하지 않고, 감사하고 소망을 갖게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소유한 사람의 생각은 이 세상에만 머물러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게 합니다. 이 세상에서 지나가버릴 일들에 연연해 하지않고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을 사모합니다. 

21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고 했습니다.  세상 어느 유명한 사람을 안다고 자랑할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어느 판사나, 총영사나, 대사나, 장관이나,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을 개인적으로 안다고 자랑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심정입니다.  대통령이 나의 사돈의 팔촌쯤 되면, 이것을 자랑하지 않고는 안달이 날 것입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주위사람들이 무어 덕좀 볼까 하여서 이 사람에게 접근하고 아는 척을 합니다. 그러나 설령 그것이 사실이더라도 그것이 그리 대스러운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도 역시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천하만물의 하나님에 비하여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존재임에도 그를 아는 것을 그와 사돈의 팔촌쯤 되는 것을 자랑하고 싶은 것이 나의 마음이라면, 그 위에 우주를 다스리시고 만왕의 왕 되시며 만주의 주되시는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 되심을 자랑하되 온 천하가 떠들석하게 자랑하여야 합니다.  일국의 대통령이 권한이 막강하다고 하더라도 그는 국민의 여론에 귀를 기울여야 하며, 그렇게 안하고 자기 멋대로 정권을 휘두루고 두고두고 하려고 하더라도 몇 십년동안 할 수가 없습니다. 그가 그의 생 동안에 아무리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고 하더라도 그는 약한 피조물이며 결국 자기의 죄 중에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자랑이신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되시며, 그의 권세는 무소불위(無所不爲)하며 감히 그 앞에 막아설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공평의 왕이시며 평강의 임금이십니다.  믿는 사람으로 우리는 바울을 자랑할 것도, 아볼로를 자랑할 것도, 게바를 자랑할 것도 없습니다. 또한 바울에게 속하여 바울과 같은 삶을 산다고, 아볼로에게 속하여 아볼로와 같은 삶을 산다고, 베드로에게 속하여 베드로와 같은 삶을 산다고 자랑할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후서 4장 5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아볼로가, 베드로가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은 그들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사람들과 환경은 하나님을 알게 하고, 감사하게 하며, 찬미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22-23절에서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믿음과 삶의 귀결은 바울도, 아볼로도, 베드로도 아니고, 현재도 내일 좀 더 나은 삶도 아니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로 이어집니다. 갈라디아서 3장 29절에서 바울은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항상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할 이유가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생명이나 죽음 그 모두가 온전히 주께 속하여 있기 때문입니다. 

3
세상의 지혜는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깨달아 알 수 없으며 오히려 이로부터 멀어지게 하지만, 하나님의 지혜는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깨달아 알게 하고, 증거케 하며, 또한 자랑하며 찬양케 합니다. 
세상의 지혜 있는 자가 되지 마시고, 세상 사람의 눈으로는 차라리 미련한 자가 되시고, 하나님의 지혜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자녀 됨을 자랑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지혜가 있는 삶이 여러분 가운데 나타나시기를 바랍니다.
 

“교회의 참된 터” (고전 3:10-17)

“교회의 참된 터” (고전 3:10-17)
           
 
  3: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12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13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14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15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리라.
 

1
냄비 신앙과 가마솥 신앙이란 말이 있습니다. 일인용 냄비에 찌개를 끓일 때 처럼 냄새도 그럴 듯하고 뚜껑도 들썩들썩하고 소리도 나고 제법 상당히 맛있는 요리가 되어가는 것 같은데 끓고 나면 항상 1인분 밖에 되지 않습니다. 성도 중에 대단히 설쳐대면서 큰 소리 치길래 무언가 하겠지 잔뜩 기대해보지만 결국은 기껏해야 자기 몫만 간신히 하는 사람입니다. 이 냄비에 물을 끓일 경우, 두께가 얇아 열 전도 속도가 빨라서 금방 끓치만 식기도 쉽게 합니다. 가마솥에 국을 끓일 때는 소리가 나지 않아 끓는지 안 끓는지, 뚜껑을 열기 전에는 냄새도 퍼지지 않아 맛이 좋을지 나쁠지도 알 수 없지만 한참을 들여 일단 끓여 놓으면, 떠도 떠도 남는 푸짐함과 속에서부터 울어나온 깊은 맛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가마솥에 물을 끓이면 그 두께가 두툼하여 더디 뜨거워집니다. 그러나, 한 번 뜨거워지면 오래오래 뜨거움을 간직합니다. 이 가마솥 신앙의 소유자는 교회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자신의 소임을 잘 감당하고 남에게 좋은 신앙의 본을 보입니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여인들 중에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두 여인이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 마리아입니다. 예수님의 육적 어머니 마리아는 처녀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낳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5세기 신학자들의 논쟁 가운데 하나는 이 예수님의 육적 어머니 마리아를 ‘Christotokos'(그리스도를 낳은 자)라고 부를 것이냐, 아니면 'theotokos'(하나님을 낳은 자)라고 부르냐 하는 것이었는데, 결국 431년의 에베소 종교회의(Council of Ephesus)에서 theotokos(하나님을 낳은 자)라고 함이 타당하다고 결정하였고, 451년의 칼세돈 종교회의(Council of Chalcedon)에서도 이를 확인하였습니다. 이로써 중세를 거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마리아는 하나님에 버금가는 존재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바티칸 교황청은 마리아까지 포함하여 4위 1체의 하나님의 교리를 만들고자 하는 움직임을 보이기까지 하지만 카톨릭 신학자들의 거센 반발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리아의 원함은 아닐 것이며, 어쨋거나, 마리아는 그의 하나님을 경외하는 거룩한 삶의 모습으로 모든 사람들 중에 커다란 축복을 받은 여인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기에, 마리아가 사촌 언니이며 세례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을 방문하였을 때,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내 주의 모친이 내게 나아오니 어찌 된 일인고?” 합니다.

일곱 귀신들렸던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베드로와 요한보다 먼저 만난 여인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원래는 비천한 출신인데, 하나님께 기도할 때 “막달란 마리아, 막달란 마리아” 하며 떼를 쓰며 간청하였기에 주님의 크신 은혜를 입었을 것이라는 우스개 소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교회를 위해서, 가정을 위해서, 나 자신을 위해서 기도할 때도 떼를 쓰며 강청할 때, 마음이 약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십니다.

카터(Jimmy Carter) 전 미국 대통령은 그의 책 「Why not the Best?」에서 “나는 내 교회의 전도 프로그램에 14년동안 참가하여 1년에 10가정씩 140가정을 방문하여 전도한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966년 내가 주지사에 입후보하고 선거운동 3 개월 동안에 악수를 나눈 사람의 수는 약 30만명에 달했습니다. 나는 나를 위해서는 3개월 사이에 30만 명을 만나보고, 하나님을 위해서는 14년 동안에 겨우 140가정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합니다.”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바른 지적입니까? 우리가 입으로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우리는 온통 나 자신과 나와 관련한 것들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주님은 항상 마음 구석에 계신 분입니다. 나의 필요가 절실할 때만 그분을 찾습니다. 어떤 분은 아예 찾지도 않습니다. 그의 변명은, ‘벼룩이도 낮짝이 있지 평소에 찾지 않다가 어떻게 필요할 때만 찾아요?“ 그러나, 우리 주님은 아예 안 찾는 사람보다 그래도 찾는 사람을 반기십니다.

2
10절에서 바울은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 은혜는 교회라고 하는 나무의 씨를 심는 달란트입니다.
교회의 터를 닦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또 다른 사람에게는 이 교회의 터위에 벽을 세우고, 기둥을 세우고, 문과 창을 만들고, 석가래를 놓고, 천장을 만들고, 지붕을 덮는 일을 맡기십니다. 이 다른 사람이란 교회를 지어가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입니다.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유형교회보다는 무형교회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그가 말씀하는 교회는 성도의 연합으로서의 교회이요, 또한 각 개인이 지어가는 그의 삶 자체가 교회입니다.
에베소서 2장 20-22절에서도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돌이 되셨느니라. 그(=그리스도)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터 위에 세워지는 교회 또한 성도들의 연합으로서의 교회와 각 성도의 삶으로 해석할 수 있으나,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에 더 가깝습니다.

11절에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합니다.
믿는 사람들의 삶--교회로서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의 터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그 어떠한 것도 이를 대체할 수도 없고 대체해서도 안됩니다.
우리의 정(情)과 욕심(慾心)이 나의 삶이라고 하는 교회의 터가 될 수 없으며, 우리의 철학이나 사상이 터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 자체인 교회의 참된 터는 우리에게 신령한 만나와 신령한 음료를 공급하시는 신령하고 굳건한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신령한 반석이시며 우리 삶의 터 되시는 예수님은 우리의 삶 가운데 늘 함께 하십니다.

모세와 이스라엘의 사건을 기록한 성경(출애굽기 17:6, 민수기 20:7-11)은 모세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행진할 때, 새로 머무는 곳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모세가 지팡이로 반석을 두드릴 때 그 반석에서 물이 솟은 것으로 되어 있지만, 오래된 유대인의 전승에 의하면 모세와 이스라엘의 행진하는 여정을 따라다니며 물을 낸 반석이 있다고 되어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4절을 보면,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磐石)은 곧 그리스도시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의 랍비문학서인 탈무드의 기록은 이스라엘을 따라다닌 반석에 대해서 언급했는데, 바울은 이 반석을 그리스도와 연결시켰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일생동안 우리와 함께 하시는 우리 삶의 굳건하고 신령한 터 되시는 반석이십니다.

12-13절에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반석되신 그리스도의 터 위에 집이나 건물로 표현되기도 하는 교회를 세웁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7장 24-27절에서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漲水)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자는 첫째로는 그 집의 터가 반석이신 그리스도시요, 둘째로는 그 집의 재료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인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또한 그의 마음 밭이 옥토(沃土)인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되 말씀과 전혀 무관한 삶을 살거나 말씀대로 행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두 종류입니다. 첫째로는 말씀을 듣지만 마음에 전혀 받지 아니하고 따라서 행하지는 더욱 아니하는 사람은 그의 삶을 모래라고 하는 터 위에 짓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그 터가 전혀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사람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14절에 나오는 육에 속한 사람이요, 그 마음이 길가의 밭입니다.
둘째로는 말씀을 듣고 머리에는 담아두는 것 같지만 그 말씀을 따라 행하지는 않고 하나님을 자신의 정과 욕심을 채우는데만 이용하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그리스도의 터 위에 집을 세우는 자같지만 그렇지 않은 자이거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집을 세우기는 한 것같은데, 그 집의 자료로 나무나 풀이나 짚을 사용한 자입니다. 환난이나 핍박이라고 하는 비가 내리고 창수(漲水)가 나고 바람이 몰아치매 날아가거나 흩어져버리거나 무너져내립니다. 지진 뒤에 불이 일어나면 다 타버리고 맙니다.
이 사람은 육신에 속한 사람이요, 돌밭이거나 가시 떨기의 밭입니다.

그리스도의 굳건한 터 위에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건물을 세우는 사람은 비바람에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아무리 커다란 환난이나 시련이 그에게 닥쳐와도 끄떡하지 않습니다. 사단이 그를 넘어뜨리려고 하다가 지쳐서 물러갑니다.

각각 공력(功力)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했습니다.
여기서 공력이란 각 사람의 행위--삶의 모습인데, 믿음의 결과로서의 행위입니다.
믿음은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나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시고 나에게 구원과 영생을 주시는 분--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임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한 사람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고자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믿음이 있다고 말하나 기실은 믿음이 없는 자입니다.

“그 날(the Day)"이란 심판의 날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공력(功力)의 어떠함을 판단하시는 날이 임할 것인데 사르는 불(Consuming Fire)로서 임하실 것입니다.

14-15절에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삶을 살았기에,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집을 지은 사람이면, 이 사람은 불로 공력이 어떠함을 보고자 할 때 그 건물이 끄떡없을 것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상급이 주어집니다. 곧 생명의 면류관이요, 의의 면류관이요, 영광의 면류관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다고 하나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삶을 살지 않은 사람은, 그 집을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지은 믿음이 적은 자요 육신에 속한 자이기에 그 집이 불에 다 타버리고 맙니다. 이 사람의 믿음의 모습은 벌거벗은 자와도 같이 부끄러운 것입니다. 이 사람도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시는데 그의 구원은 벌거숭이의 부끄러운 구원입니다. 그는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지만 자랑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16-17절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나님의 교회요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실 때(요한 2:19-21),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셨는데, 그때 예수님은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몸이 성전인 것은 그가 하나님이신 까닭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믿는 사람을 가리켜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한 것은 우리의 몸 안에 “하나님의 영”--성령이 거하시는 때문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걸어 다니는 교회요 성전입니다(walking church or temple).
모세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40년동안 가나안 땅을 향하여 행진할 때에 하나님의 영광이 이동(移動)하는 성막(moving tabernacle)에 거하셨습니다. 사도행전 7장 38절에서 스데반은 이를 광야교회(ἡ ἐκκλησία ἐν τῇ ἐρήμῳ: the church in the wilderness)라고 했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인생이라고 하는 광야를 지나 영적 요단 강을 건너 영적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를 사모하는 “행진하는 광야교회”(a marching church in the wilderness)입니다.

광야를 행진할 때 우리에 앞서 가시며 우리의 길을 구름기둥으로,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십니까? 우리의 행진에 함께 하시는 우리에게 영의 양식과 신령한 물을 공급하시는 그리스도를 마음 속에서 느끼십니까?

우리는 일생을 거쳐 성전을 더 아름답게 더 거룩하게 지어갑니다.
우리의 참된 성전은 유형의 건물이 아니요, 그리스도가 중심에 계시는 우리의 삶 그 자체입니다.

솔로몬의 성전은 7년에 걸쳐서 지어졌고,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 후에 스룹바벨 성전은 4개월만에, 그리고 예수님 당시의 헤롯 성전은 80년에 걸쳐서 완성되었습니다.
헤롯 성전이 웅장하고 아름다웠지만, 하나님의 영광이 그 안에 계시지 아니하였고 하나님께서 그 성전을 폐하실 때, 예수님께서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고 예언하신대로, 철저히 무너져 내렸습니다. 이는 헤롯 왕이 성전 건축을 위해서 사용한 외적 재료는 금이나 은이었을지라도 마음 중심의 재료는 나무나 풀이나 짚이었기 때문입니다.

대형 건물에 대한 한국 교회들의 욕심은 무엇입니까?
대형 건물이 교인들에게 뿌듯함이 되며 자랑거리가 됩니까?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나’라고 하는 ‘주님의 교회’ 안에 그리스도가 계신가 함입니다.
내 속에 역사하시며 나의 삶을 인도하기를 원하시는 그리스도를 발견하며 바라봄입니다.
여기에 진정한 위로가 있으며 믿는 사람의 자랑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에게 원하시는 궁극적인 삶의 모습은 거룩함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반복하여 말씀하실 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5)고 명하십니다.
우리의 거룩은 구분된 삶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헌신(獻身)하는 삶입니다.

3
우리의 믿음의 삶이 교회이요 성전입니다.
우리의 삶--교회는 그리스도와 그 말씀이라고 하는 참된 터 위에 지어져가고 있습니까?
우리의 삶의 재료는 무엇입니까?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믿음의 집을 지어가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가나안 땅을 향하여 인생이라고 하는 광야를 행진하는 광야교회입니다.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같이 하나님의 영이 머무시는 우리의 삶을 거룩하고 구별되게 보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