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후서를 시작하면서” (살후 1:1-2)
1: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2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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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이 주기도문을 마치 주문(呪文) 외듯이 합니다. 모든 모임이나 목사님이 없는 예배의 끝은 주기도문으로 끝내어야 되는 것처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기도문-주님 가르쳐주신 기도는 이와 같이 그 내용의 의미도 생각지 않고 낭비되거나 남용될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의미 있는 주님의 은혜의 가르침이라고 하더라도 다만 그 가르침이 우리 입술에만 머물러 있을 때 그것은 우리 삶과는 전혀 무관한 것입니다.
주기도문의 남용을 경계하는 글이 인터넷에 오른 적이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하늘에 계신” 하지 말아라. 세상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우리” 하지 말아라. 너 혼자만 생각하며 살아가면서.
“아버지” 하지 말아라. 아들딸로서 살지 않으면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 하지 말아라. 자기 이름을 거룩히 여김 받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면서.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시며” 하지 말아라. 물질만능의 나라를 원하면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하지 말아라. 내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면서.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하지 말아라. 가난한 이들을 본체만체 하면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여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하지 말아라.
누구에겐가 아직도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하지 말아라. 죄 지을 기회를 찾아다니면서.
“악에서 구하소서” 하지 말아라. 악을 보고도 아무런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으면서.
“아멘” 하지 말아라. 주님의 기도를 진정 나의 기도로 바치지 않으면서.
우리의 예배와 성경공부와 찬양이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예배와 성경공부와 찬양이 우리 삶을 변화시키는 것들이어야 할 것입니다. 일주일에 다섯 번 예배드리는 사람의 삶이 일주일에 한 번 예배드리는 사람의 삶과 마찬가지라면, 아니 예배를 전혀 드리지 않는 세상사람들보다 나은 삶이 없다면, 그들이 하는 근심과 걱정을 여전히 다 하고 그들의 탐심이나 자기자랑이 여전히 이 사람에게도 있다면, 그 사람은 예배의 풍성한 은혜 안에 거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2
데살로니가후서는 바울의 첫 번째 서신을 받은 데살로니가 교인들 가운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언제 있을지 모르니 대충 아무렇게나 이 세상 삶을 살자는 분위기가 있다는 말을 전해들은 바울이 그의 서신에 대한 그들의 잘못된 이해와 잘못된 삶의 태도를 바로 잡기 위하여 보낸 서신입니다.
1절: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바울은 그의 서신을 문안인사로 시작합니다.
바울의 편지를 보면, 로마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디모데전서와 후서, 디도서 등에서는 그 자신만의 이름을 썼지만, 그의 다른 서신들에서는 동역자와 함께 보내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는 소스데네, 고린도후서, 빌립보서와 골로새서에서는 디모데, 데살로니가전서와 후서에서는 실루아노와 디모데와 함께 서신을 보내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또한, 바울의 서신에는 자신의 사도권을 소개한 서신과 소개치 않은 서신이 있습니다.
로마서, 고린도전서와 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골로새서, 디모데전서와 후서, 그리고 디도서 등에서는 자신을 사도라고 칭했으나, 빌립보서와 빌레몬서, 그리고 데살로니가전서와 후서에서는 사도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아마도 빌립보 교회와 같이 데살로니가 교회도 바울의 사도 됨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교인들과 바울이 친밀한 관계에 있는 사이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바울이 실루아노와 디모데의 이름을 언급한 것은 자신과 함께 주님의 일을 감당하는 연소한 동역자들의 사기를 높여주기 위함이며 모든 명예와 공로를 함께 나누는 겸손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루아노는 사도행전 15장 22절, 16장 25절과 17장 10절 등에 나오는 실라와 동일인물입니다.
실루아노는 유대인으로 예루살렘 교회의 중진인물로 안디옥 교회 및 기타 이방인 교회에 예루살렘 사도회의 결과를 전달하도록 뽑힌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행전 15:22).
바울은 바나바와 그의 조카 마가의 일로 다투고 헤어진 다음에 2차 전도여행 동반자로 실루아노를 택하였습니다. 그는 바울의 좋은 협력자였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의 가장 잘 알려진 동역자로 루스드라 출신의 사람이었습니다. 헬라인 아버지와 믿는 유대인 어머니 유니게의 아들로,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의 신앙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6장 1절 이하에 나오는 대로 그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받는 자로서 바울의 2차 전도여행 중에 택한 협력자였습니다.
바울은 연소한 디모데의 헌신을 매우 귀하게 여겼습니다. 빌립보서 2장 22절에서 바울은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바울에게 디모데는 “믿음 안에서 참아들”(딤전 1:2), “사랑하는 아들”(딤후 1:2), “주 안에서 내가 사랑하는 신실한 아들”(고전 4:17)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를 서술할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라고 했습니다.
교회와 일반 사회모임과의 결정적인 차이는 교회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임이고, 일반 사회모임은 “밖에 있는 모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되어지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뜻 안에서 되어져야 합니다. 모임의 시작도 기도로 시작하고 끝도 기도로 끝나는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간구하며 인도하심대로 따르겠다는 작정의 표시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모임을 세상 모임처럼 여기는 마음이나 행동은 참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교회”라는 말--에클레시아--이 또한 세상으로부터의 분리 또는 구분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구약시대, 또한 예수님과 바울 당시의 유대인들에게는 생소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서너 곳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표현하는 곳이 있기는 합니다:
시편 68편 5절에서 “그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고 했고,
시편 89편 26절에서 “저가 내게 부르기를 주는 나의 아버지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 하리로다.”고 했습니다.
이사야 9장 6절에서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일상의 삶 가운데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그들의 “아버지”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가르쳐 주신 분은 예수님이신데, 바울은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그의 모든 서신에서 인정하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 가까이 계셔서 우리의 모든 사정에 귀 기울이시며 응답주시는 우리의 아빠와도 같은 친근한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종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녀로 여기신다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6-7절에서 바울은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말씀합니다.
로마서 8장 14-15절에서 바울은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 되시며 우리 교회에 많은 관심과 사랑을 갖고 계신 분이십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란 바울이 많이 사용하는 표현으로 그리스도와 성도들의 연합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주어지며 평안과 기쁨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은 영적 축복의 근원이요 영역입니다.
2절: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데살로니가인의 교회를 위한 바울의 축원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임하는 은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에게 있을 때 우리는 이 세상의 삶에서 여유를 가질 수 있습니다. 환난이나 곤고 가운데서도 인내할 수 있으며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차가 달리기 위하여 가솔린을 필요로 하듯이 하나님의 은혜는 성도들로 선한 싸움을 싸우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의 은혜가 있을 때 주님의 평강이 우리에게 임합니다. 근심과 걱정 중에서도 평온한 마음을 가질 수 있으며, 생활의 곤경 가운데도 초조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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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교회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입니다. 해서, 세상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기를 소망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교회의 예배와 찬양을 통하여 우리의 삶이 나아지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드린 예배와 찬양의 횟수만큼이나 우리의 삶에 진보가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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