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April 9, 2017

“디모데의 보고” (살전 3:6-10)



디모데의 보고” (살전 3:6-10)
               

   3:6    지금은 디모데가 너희에게로부터 와서 너희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또 전하고 또 너희가 항상 우리를 잘 생각하여 우리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 함과 같이
            너희도 우리를 간절히 보고자 함과 같이 너희도 우리를 간절히 보고자 한다 하니
     7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8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9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를 인하여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노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보답할꼬?
     10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의 부족함을 온전케 하려 함이라.


1
어떤 장로님의 아들이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해서, 장로님은 그가 평상시에 하지 않던 또는 하긴 해도 건성으로 하던 가지 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번째는 매일 아들을 위하여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번째는 매일 아들을 위하여 성경을 읽어주었습니다. 장로님의 지난 동안에 그렇게 열심히 하나님께 매어 달려 기도하여 적이 없고, 그렇게 진지하게 성경을 읽어본 적이 없었는데, 교통사고를 당한 사랑하는 아들로 말미암아 장로님은 매일 기도하고 성경을 읽는 장로님이 되었습니다. 과정 가운데 그의 신앙의 눈이 뜨이고 그가 하나님께 회개할 , 새로운 영의 세계를 체험하게 되었다고 간증합니다.

마라톤을 달리는 경주자들은 어느 일정 구간을 빠른 속도로 달린다고 하여서 우승하는 것이 아니라 42.195Km 구간을 일정한 속도로 꾸준하게 달려야 좋은 성적을 거둘 수가 있습니다. 낙오되지 않고 좋은 속도를 유지하기 위하여 때로는 그룹을 지어 달리기도 합니다.
마라톤 경주자의 가장 경쟁자는 최종 종착점에서는 그의 옆이나 앞에서 달리는 경주자이겠지만, 달리는 동안에는 그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자신의 나약해지는 마음일 것입니다.
, 너무 힘들면 기권하는 것이 어때?”
이렇게 힘들게 달려서 뭐할 건데?”
네가 아무리 열심히 달린다고 같애?”

우리 믿는 사람들의 신앙생활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마라톤과도 같습니다.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며 정지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앞으로 달려나가야 것입니다.
마라톤과 다른 것이 있다면, 마라톤에서는 다른 사람들보다 빨리 달려야만 입상을 것이지만, 신앙의 달리기는 상대 평가가 아니라 절대 평가라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상급이나 면류관은 사람보다 빨리 달리지 못하였다고 하더라도 내게 주신 상황 속에서 내가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여 노력을 경주하였는가로 결정됩니다.

신앙의 달리기를 함에 우리의 노력이나 경주는 구원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의 한결같음이나 신실함과 거룩함의 과정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여 두신 면류관과 상급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나는 구원받기만 하면 되지 상급이나 면류관은 필요 없어요.”라고 말할 사람이 있겠지만, 하늘의 상급과 면류관이 얼마나 아름답고 큰지 면류관과 상급을 사모하지 않은 사람들은 나중에 반드시 후회하게될 것입니다.
 
2
    6: 지금은 디모데가 너희에게로부터 와서 너희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고 또 너희가 항상 우리를 잘 생각하여 우리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 함과 같이 너희도 우리를 간절히 보고자 한다 하니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뒤늦게 디모데의 보고는 바울의 걱정과는 달리 꽤나 고무적인 것이었습니다. 디모데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 관하여 바울에게 전하여 기쁜 소식은 그들의믿음과 사랑이었습니다. 교회가 환난과 핍박 중에 있는 데도 성도들에게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있다는 것은 복음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바울이 전해 복음을 받아들여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을 유지하고 있었을 아니라 바울이 그들을 사랑하고 간절히 보고싶어 같이 그들도 바울과 일행을 간절히 보고싶어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목회를 하면서 사람들이 변화되는 것을 보기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입니다. 하기에, 목회가 어렵고 때로는 그만두고 싶은 마음까지 듭니다. 그런데, 목회를 하다보면 간혹 사람은 절대로 아니야라고 제쳐 사람들 가운데 간혹 변화되는 것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목회자는 목회의 보람을 느끼고 계속 목회하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사람의 변화가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복음의 능력이 사람을 사로잡을 그의 삶은 온전히 변화되어질 있습니다.

바울의 입장에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가르친 기간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데 어린아이처럼 여겨지는 그들이 환난과 핍박에도 변치 않는 믿음을 지키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준 바울을 간절히 보고싶어 한다는 말을 들었을 그의 보람이 어떠하였겠습니까?

제가 버지니아에서 공부하면서 학원목회를 감당할 당시 대학생들이 얼마나 열심히 있었는지 저의 열심을 앞서갔습니다. 저는 그들이 학생으로서 주일 이외에 일주일에 토요일 모이는 것으로도 족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들은 주중에도 차례 소그룹 성경공부를 하기를 원하였습니다. 학생 수가 60-70명이 되니 매일 소그룹 성경공부가 있게 되었습니다.
수련회도 학생으로서 일년에 번이면 족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들은 -가을 차례 수련회를 갖기를 원하였고, 준비도 철저하고 진지하게 잘하였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 목회를 하다보니, 일반 성도들 가운데 그와 같이 열정을 갖고, 들은 이상으로 행하는 교인이 드묾이 안타깝게 여겨집니다.
목회자의 목회나 일반 성도의 신앙생활이 굳이 사람을 감동시키고 기쁘게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의 최선을 드릴 이것이 사람을 감동시키고 기쁘게 수도 있는 것입니다.

    7: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바울의 선교사로서의 보람은 그의 복음을 전하여 받은 사람들이 꿎꿎하게 믿음을 지키며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할 그는 그의 선교가 아무리 어렵고 궁핍과 환난이 많다고 하더라도 보람을 느낄 것이며 위로를 얻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가 개척한 고린도 교회 교인들의 분당과 분쟁과 기타 여러 가지 문제들로 안타까워하기도 하였지만 빌립보 교회나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순전한 믿음으로 인하여 위로 받기도 하였습니다.

    8: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안에 굳게 것으로 바울이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의 유무가 바울의 사는 보람이나 맛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자녀를 기르는 부모들은 자녀의 잘됨이 마치 자기의 삶의 의미의 전부처럼 여겨집니다.
자녀가 무슨 경시대회에 입상이라도 하면 자기의 잘됨보다 좋아하게 됩니다.
자녀가 무슨 사고라도 친다면 맛을 온통 상실하게 됩니다.
부모의 삶은 자녀의 삶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자녀의 삶에 무관하고자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음을 발견합니다.

목회자의 보람이나 살맛도 교인들의 신앙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교인들간에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목회자는 목회할 맛을 상실하게 됩니다. 교인들간의 문제가 혹은 불신앙의 책임이 온통 자신에게 있는 것처럼 그렇게 목회의 보람과 맛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러나, 교인들의 신앙에 무슨 진보라도 있을라치면 그것이 마치 자기가 목회를 해서 그런 알고 커다란 보람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바울이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것은 바로 선교사의 보람이 있다는 뜻이요 복음증거자로서 살맛이 난다는 뜻입니다.

    9: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를 인하여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보답할꼬?

바울의 기쁨은 궁극적으로 하나님 앞에서입니다. 그가 데살로니가 교인들로 기뻐하지만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그에게 허락하신 분도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께 감사하기를 원하였습니다.

우리들의 삶에 항상 하나님께 감사함이 필요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 삶의 주인이시오 우리의 기쁨과 찬양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10: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의 부족함을 온전케 하려 함이라.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은 믿음의 연륜으로 보면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믿음의 연수가 오래인데도 불구하고 젖먹이 신앙으로 생활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들은 달여 신앙의 연륜을 가지고도 그들 앞에 놓인 환난과 핍박을 견디며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은 연륜에 비하여 대단하다는 것이지 우리가 달려나갈 절대적인 선이나 목표에 비하면 참으로 것입니다.
절대적인 목표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론 어느 목회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인생들은 육체의 연약함으로 목적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하여서 괜찮은가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약함을 아시지만 그러나 우리 앞에 절대적인 목표를 두셨습니다.
그리고는, 우리 믿는 성도들이 목표를 향하여 매일 매일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바울은 자신이 거룩의 완성을 위하여 매일 매일 자신을 죽이며 성화되는 삶을 살아갔었던 것처럼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온전을 위하여 밤낮으로 심히 간구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3 12-14절에서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좇아가노라.” 했습니다.

3
우리 교우들은 서로를 위하여 격려하고 또한 기도해 것인데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부르심의 상을 좇아 달려갈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나보다 달리기 때문에 내가 받을 상을 잃는 일은 없습니다. 해서, 사람은 나의 경쟁상대가 아닙니다. 나의 경쟁상대는 오히려 안에 역사하는 방해꾼들입니다. 나를 방심하게 하고 나로 사람을 경계하게 하는 사단의 미혹이 나의 대적이요 물리쳐야 대상입니다.
우리는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위하여 밤낮으로 심히 간구하고,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바울 보기를 심히 원하였듯이, 그렇게 서로 사랑하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심정으로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온전히 경주해 나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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