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April 10, 2016

“잠자는 자여 일어나라” (에베소서 5:6-14)

“잠자는 자여 일어나라” (에베소서 5:6-14)
          
  5:6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7   그러므로 저희와 함께 참예하는 자 되지 말라.
     8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외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10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11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12  저희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
     13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
     1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

1
물질은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있는데, 비본질적인 외형을 구성하는 요소를 accident라고 하고 본질적인 실체를 구성하는 요소를 substance라고 합니다. 그 물질을 그 물질처럼 보이게 하는 것--곧, 형태, 맛, 색깔과 냄새 등은 accident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서 히브리서 기자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표현할 때, 이 실상(實狀)을 영어성경은 substance 혹은 assurance라고 번역했습니다. 즉,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본질적인 실체라는 뜻입니다.
한 물질의 외형인 accident는 비본질적인 요소이나, 많은 사람들이 이것에 많은 관심을 갖고 이것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화를 내고 슬퍼하고 또는 즐거워하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우연하게 혹은 돌발적으로(accidentally) 다가오는 환경이나 고난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다만 비본질적인 요소일 뿐입니다. 해서, 이로 인하여서 우리의 믿음이 시험을 받거나 넘어져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이 비본질적인 환경과 조건 속에 내재하시는 우리 믿음의 본질, 본체이신 주님을 발견하여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주님을 바라봄으로 각기 다른 환경 가운데서도 감사가 넘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할 때에는 나의 뜻대로 되어지지 않는 환경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원망을 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과 다스리심을 이해하고 경험한 사람은 어떠한 어려움과 고통이라고 비본질적인 여건 가운데서도 본질적인 실재이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주님께 감사와 기쁨을 돌려드립니다.
구약의 하박국 선지자가 그 대표적 예입니다. 그는 유다 나라가 갈대아인의 침공을 받고 예루살렘이 훼파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심히 두렵고 마음에 분함마저 생깁니다. 유다가 하나님의 백성인데 설혹 약간의 악행과 불순종이 그 가운데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 아닌 더 악독한 갈대아인을 들어서 심판하실 것이라니 어떻게 이렇게 하실 수 있나? 하박국은 강한 불만과 분을 발하며 하나님께 항의합니다. 그러나, 궁극적(窮極的)으로 악인에 대한 심판과 어려운 상황 가운데도 믿음을 지키는 의인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구원계획을 이해한 하박국은 하나님께 기쁨과 찬양을 돌립니다.
하박국 3장 17-19절에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비본질적인 현상인 환경과 조건을 이기는 절정적인 믿음의 고백을 바울의 로마서 8장 35-39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

우리의 실패함과 부족함이 우리를 가슴 아프게 하며,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 우리를 고통스럽고 두렵게 하여 우리의 믿음을 없애고자 하며 우리를 넘어뜨리고자 하나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다함 없는 본질적인 사랑에 대한 확신으로 여전히 감사와 즐거움이 넘쳐납니다. 우리 모두가 제각기 다른 환경 가운데 이와 같은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기 바랍니다.

2
6-7절: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그러므로 저희와 함께 참예하는 자 되지 말라.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사람들에게서 제일 먼저 느껴지는 변화는 말에 있다고 했습니다.
전에는 에베소서 4장 25절에서와 같이 거짓말을 하던 사람이었고, 4장 29절에서 볼 수 있듯이 더러운 말을 하던 자이고, 5장 4절에서와 같이 누추한 말과 어리석은 말과 희롱의 말을 하던 자이었습니다. 또한 6절에 있는 대로 헛된 말을 하던 자이었습니다.
거짓말과 더러운 말과 누추한 말과 어리석은 말과 희롱의 말과 헛된 말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찬미에서 멀리 떨어져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즐겨 해야 할 말은 4장 25절에서와 같이 참된 말이며, 4장 29절에서와 같이 선한 말이며, 5장 4절에서 보는 대로 감사하는 말입니다.
불순종의 사람들이 우리를 미혹(迷惑)하여 그들과 같이 불순종과 불신앙의 삶을 살아가게 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리할 때 우리도 불순종의 아들들과 같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이게 될 것입니다.

8절: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우리가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 영적으로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었을 때, 언약들에 대해서 외인이요,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었을 때, 우리는 어두움이었습니다.
사단에게 종노릇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어 빛 되신 그리스도 우리 주님 안으로 들어왔을 때, 밝은 빛 되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빛이 됩니다.
요한은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하는데, 요한복음 1장 9-10절에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라고 했으며, 3장 19절에서 “그 정죄(定罪)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사도행전 9장에 기록된 대로, 바울이 다메색으로 가는 길에서 만난 예수님도 빛 가운데 임하신 주님이었습니다. 빛 가운데 임하신 그리스도께서 사울에게 비취시매 그의 본질적인 삶이 변하고 사울에서 바울로 바뀌었습니다. 사울은 그리스도를 핍박하던 자의 이름이고, 꼭 같은 외형이나 바울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그를 위하여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오히려 영광과 기쁨으로 여기는 자의 이름입니다.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했습니다.
빛 되신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의 삶은 떳떳합니다. 밝음 아래 있기에 솔직하고 숨길 것이 없습니다.

9-10절: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함과 같이 빛의 자녀의 행위는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열매를 맺는 삶입니다.
이와 같은 빛의 자녀들의 삶은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립니다.
로마서 12장 1-2절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씀한 대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속한 빛의 자녀로서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과 거룩함의 열매가 나타나는 삶을 사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영적 예배의 삶입니다.

11-12절: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저희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어두움의 일은 열매가 없다고 했습니다. 열매가 없다고 함은 우리에게 아무 유익을 주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해를 줄뿐이라는 뜻입니다.
어두움의 일은 거짓말, 더러운 말, 누추한 말, 어리석은 말과 희롱의 말이며, 5장 3, 5절에서 보는 바대로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의 생각과 행함입니다. 이 어두움의 말과 생각과 행함이 사람으로 하여금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함을 방해합니다.

13절: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

책망 받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목사인 저에게 다른 사람이 “목사님, 그렇게 하면 안 되죠. 이렇게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목사님, 성격이 급하신데 이 일은 조금 천천히 하십시오“ 하면 속으로는 인정하면서도 겉으로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적하는 분이 저를 위하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임을 알 때, 저의 결점에 관하여 듣는 순간에는 기분이 좀 언짢다 하더라도 돌아서서 생각해보게 되고 또한 잘못된 부분들을 고치고자 하는 노력을 하게 됩니다.

우리의 죄성(罪性)이나 허물에 관하여 지적을 받거나 책망을 받을 때, 우리는 일시적으로 근심하게 되나 이로 인하여 우리의 죄와 허물을 회개하고--고치고 이에서 돌아설 때, 전에는 어두움의 일이던 것이 이제는 빛의 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을 책망하는 편지를 쓴 바울은 이에 대해서 자신의 아픈 마음과 의도를 전하는데 고린도후서 2장 4절에 “내가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고 했고, 이어지는 편지 7장 8-9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後悔)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悔改)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죄와 허물들을 고치고 이에서 돌이킴으로써 우리의 말과 생각과 행함이 빛으로 나타나지기를 소망해야 할 것입니다.

14절: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

바울은 이사야서 60장 1절,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를 인용하여,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잠자는 자와 죽은 자란 구별된 표현을 사용하는데, 사실 잠자는 자도 죽은 자입니다. 그러나, 깨어날 소망이 그들에게 있기에 잠자는 자라고 구별한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1절에 보는 바대로 모든 인간이 다 “허물과 죄로 인하여 죽었던 자들”입니다.
에베소서 2장 5절에서는 “허물로 인하여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라고 했습니다.
생명의 빛으로 오신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 빛을 비취실 때 그 빛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일어날 뿐 아니라 우리의 작은 빛의 삶으로서 아직도 죽은 자들 가운데 잠자는 심령들의 영적 잠을 깨우기를 원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영광 중에 우리에게 빛을 비취실 때 우리는 영적인 잠에서 깨어 빛을 발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3
육신(肉身)의 잠에 흠뻑 취하여있을 때에는 아무리 목이 갈하여도 손을 뻗으면 닿는 거리에 있는 물 컵조차 잡기가 귀찮고 싫습니다. 누가 그를 깨우려하면 짜증이 나고 화가 납니다.
생리적으로 아랫배가 더부룩하여 화장실에 다녀오면 편한 잠을 잘 수 있을 텐데 일어나기가 귀찮아서 밤새도록 거북한 잠을 자는 사람도 있습니다.
영혼(靈魂)의 잠을 자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혼의 목이 갈하여 하나님께서 공급하여주시기를 원하는 생수의 컵을 마음 속에서 찾기는 찾지만 손을 뻗어 그 컵을 잡고자 하지는 않습니다. 영적인 양식에 주려하지만 잠에서 깨어 일어나 생명양식을 먹고자 하지는 않습니다. 매일 10분 정도 시간을 내어 기도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매일 시간을 내어 10분-20분 정도 성경말씀의 꼴을 먹는 일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닌데 영혼의 잠에 취하여 그리 하지 못합니다.
더욱이 옆 사람이 나의 영혼의 잠을 깨울라치면 그 사람에게 도리어 그에게 “제발 그냥 내버려 두라!”고 화를 냅니다.
잠에 취하여 있습니까?
영혼의 잠에서 깨어나기 바랍니다.
그리고 밝은 빛 되신 주님께로 더욱 더 가까이 나아가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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