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April 3, 2016

“하나님을 본받는 자 되라” (에베소서 5:1-5)


  “하나님을 본받는 자 되라” (에베소서 5:1-5)
           
 
  5:1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祭物)과 생축(牲畜)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3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4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5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나니
 

1
찬송은 우리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하는 하나의 방편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찬송을 부르는 재미로 교회생활을 하고 그 이상은 더 하려고도 하지 않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로 찬송을 부르게 하시는 목적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까닭입니다.
에베소서를 통하여 바울도 반복하여 말씀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하나님을 찬미(찬송)케 하기 위함이십니다.
그러나 또한 이 우리가 부르는 찬송을 통하여 우리 강퍅하고 자고한 마음이 녹아져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더욱 더 가까이 나아가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꿇고 그 분에 대해서 알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성가곡을 들을 때 혹은 부를 때 은혜스럽다, 감동을 받았다는 말을 쓰지만 잘못된 것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청소년들이 종종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소위 크리스천 록 그룹(rock group)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부르는 요란한 찬송 가운데는 그 가사의 내용을 알면 사단을 찬양하는 것이지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라고 볼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즐겨 듣고 불러온 구노(Gounot)의 아베마리아도 사실 그 라틴어 가사내용을 알면 크리스천들에게는 금기(禁忌)의 곡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베마리아(Ave Maria)란 말 자체가 '마리아 찬양'(Hail Mary)이란 뜻으로서 찬양과 경배의 대상이 하나님이 되어야 할 크리스천들에게는 맞지 않습니다.
가사내용을 살펴보면 더욱 더 멀리 하여야 할 곡임을 깨닫게 되는데, “아베 마리아(=찬양받으실 마리아여) 은덕이 넘치는 성모님이시어! 사랑에 넘치시도다. 거룩하신 성모시여! 기도를 받으소서. 예수님의 어머니 되시는 산타마리아(=거룩하신 마리아여), 번민(煩悶)하는 나를 구원(救援)하옵소서. 이 몸이 살아 있을 때나 죽은 때나, 아멘.”
그런가 하면 슈베르트(Shubert)의 아베마리아(Ave Maria)도 마찬가지로 그 내용은, “아베마리아 성모여! 거칠고 험한 이 세상에, 이 몸이 정성을 다하여 기도함을 들으시나요? 우리를 아침까지 지켜주시고 이 세상 험하오니 돌봐주소서. 내 서러움을 들으사 구원하옵소서. 아베마리아.”
마리아가 인간으로서는 하나님의 축복을 크게 받은 여인이지만 우리 기도와 경배의 대상은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경배와 찬양의 대상도 하나님이시요, 우리의 기도의 대상도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이는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우리의 창조자시요, 구속하시고 구원해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되 자신이 아들의 형상으로 우리에게 오사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십자가에 주신 분이시기에 우리의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찬송은 우리의 마음을 열어줍니다. 같은 찬송이지만 전에는 내가 감동을 느끼지 못하였는데, 어떤 상황 가운데 동일한 찬송을 들을 때 그 찬송을 통하여 성령께서 나의 마음을 열어주시고 강한 감동을 주심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언젠가 노회모임에 참석하였는데, 한국인 2세로서 미국장로교 총회 대표단 가운데 한 명으로 북한을 방문하고 오신 장로님의 북한방문 보고를 듣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는 뉴욕에 있는 한 대학에서 미생물학을 가르치고 있는 분인데, 보고 마지막에 그분이 북한 교회를 방문하였을 때 그곳 교인들하고 같이 불러 은혜를 느꼈다는 410 장 찬송이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그 장로님은 체구가 참으로 외소하신 분이었는데, 이 찬송을 본인이 직접 부르기 위해서 피아노를 연주하는데 그분의 세련된 전주에 마음이 쏠리기 시작하고 그가 1절과 4절을 한국어로 찬송할 때 그 내용과 그가 북한교회 교인과 함께 이 찬송을 부르는 장면이 연상되며 제게 한없는 성령의 감동이 임했습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 데 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잘 아는 주님. 늘 돌보아 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주 언제 강림하실지 혹 밤에 혹 낮에. 또 주님 만날 그곳도 난 알 수 없도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잘 아는 주님. 늘 돌보아 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공산정권의 독재 가운데 있을 때도, 세상이 주는 슬픔과 상처 가운데 있을 때도 우리가 감사하고 기뻐할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쓸 데 없던 자이던 나를 사랑하셔서 구속하시고 구원하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찬송을 통하여 우리가 성령의 감동 가운데 사랑과 은혜를 접하게 되지만, 그러나, 찬송이 우리 신앙생활의 긍극적인 목적이 되지는 않습니다. 이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의 마음 문을 여는 한 방편이며 해서 겸손하고 열린 심령으로 하나님의 진리가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인지 더 잘 알고자 힘쓰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2
1절: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바울은 고린도전서 4장 16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했고, 고린도전서 11장 1절에서는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 말씀하고, 또 데살로니가전서 1장 6절에서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고 말씀합니다.
‘본받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미메오마이(μιμέομαι)는 ‘따라 행하다’(imitate)의 뜻과 함께 ‘(본받는 자에게) 순종하다’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이 본받는다는 의미는 단순히 외적인 행동을 흉내내는 것이 아닙니다. 원숭이가 사람의 행동을 잘 흉내내지만 이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본받는다의 의미가 아닙니다. 본받는다 함은 그 의미를 이해하고 따르는 행함입니다.
하나님의 무엇을 본받으라는 뜻입니까?
에베소서에 나오는 것으로는 4장 24절에 나오는 대로 하나님의 진실하심-거짓이 없으심을 본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본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레위기에서 반복하여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반복하여 말씀하시는 대로 우리는 음란과 더러움을 제하여 버리고 하나님의 거룩하심(holiness)에 참예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4장 32절에 나오는 대로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형제를 용서하지 않을 때 하나님도 우리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신다고 마태복음 6장 14-15절에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또한 온전하신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5장 48절에서 예수님은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온전하다(perfect)’고 함은 흠과 티가 없다는 뜻입니다. 곧, 우리의 죄된 마음과 그것이 밖으로 표현된 허물을 주님께 자백하고 고쳐나감으로 주님의 온전하심(perfectness)에 이르러야 합니다. 그 길잡이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신 성경입니다.
성경이 우리의 흠과 티를 비춰주는 거울이 되고 이를 우리가 제하고자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온전하심에 가까이 이를 수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3:16-17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긍휼하심을 본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6장 36절에서 예수님은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과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자비하다’(merciful)는 불쌍히 여김을 받을 자를 불쌍히 여기고, 구제를 받아야 할 자에게 구제를 베푸는 마음과 행함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인생을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의 사랑을 베푸신 그 자비하심을 본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 위에 하나님을 본받는 자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울이 권면하는 말씀이요, 그가 ‘그리스도를 본받는다’ 할 때, 그는 자신의 전적인 순종과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삶을 말씀한 것입니다.

2절: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또한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되 아들의 형상인 그리스도 예수로 오시고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로 드려지되 구약의 희생가축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단번에 우리의 과거 죄와 현재 죄와 미래 죄를 사하여주시는 피제사로 드려지셨습니다.
이와같이 진실하시고, 거룩하시고, 온전하시고, 자비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본받고자 하는 우리에게서 제하여 버릴 것이 있습니다.
 
3-4절: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열거된 것들은 하나님의 속성과는 반대되는 것이며 하나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기를 원하는 우리가 여전히 이런 것을 마음과 입술과 우리 육체에 갖고있을 때 우리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의 원하는 곳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5절: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3절에 열거된 음행과 더러운 것과 탐욕이 죄성(sinful nature)이라고 하면, 5절에서 말하는 바는 이 죄성을 행하는(practice) 자들입니다. 바울은 이와같이 죄성을 버리려고 하지않고 죄성에 따라 사는 자들을 우상숭배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속한 재물이나 명예나 지위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자만이 우상숭배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인 거룩함, 온전함, 자비함과 사랑함 보다도 음행과 더러운 것과 탐욕에 따르는 삶을 살아나가 하나님을 본받는 삶에서 멀리 떨어져있는 자도 우상숭배자란 뜻입니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얻지 못한다고 강한 경고의 말씀을 합니다. 곧, 세상의 죄성에 따라 여전히 썩어져가는 삶을 사는 사람들은 입술로는 주를 고백하였을지 모르지만 마음으로는 주님을 믿지 않는 자이며 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3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을 본받는 자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진실하심과 거룩하심과 온전하심과 자비하심과 사랑하심을 본받아 우리의 삶 가운데 이러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어지기를 소망합니다.
그를 위해 사단에 의하여 여러분에게 덧입혀진 죄성들-음욕과 더러움과 탐욕과 기타 모든 부정한 것들을 주님께 자복(自服)하고 이로부터 될 수 있는 대로 멀리 떠나 하나님의 형상에 가까이 이르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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