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September 20, 2015

“저주 아래 놓이신 예수님”(갈 3:10-14)


“저주 아래 놓이신 예수님”(갈 3:10-14)
          
  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함이니라.


1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는 가운데 스스로를 주문(呪文)이나 마력(魔力), 또는 저주(咀呪) 아래 놓는 삶을 사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가운데도 관상(觀相)이나 사주팔자(四柱八字) 등 점을 보러 다니고 또 이를 믿는 사람들이 꽤 됩니다. 점집에 가서 점을 봤는데, 점술가가 이르기를 “올해 당신에게는 액운(厄運)이 끼었습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부적을 몸에 지니고 다니면 괜찮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큰 화를 당할 것입니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부적(符籍)을 한 장 만들어 주겠다고 하는데 그 금액이 만만치가 않습니다. 해서, 부적을 몸에 지니지 않고 생활하는데 왠지 찜찜하고 어느 때인가 예고 없이 화(禍)를 당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럴 때, 이 사람에게 바로 점술가의 점괘가 저주꺼리이며, 그는 점괘의 저주 아래 놓인 사람입니다.

야구선수의 아내가 남편에게 십자가 목걸이를 선물하며 말합니다. “운동경기가 있을 때마다 이 목걸이를 착용하세요. 이 목걸이가 당신에게 행운을 가져다 줄꺼예요.” 이 말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남편이 어느 날인가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시합에 나갔는데, 그날 따라 수비도 잘 되고 타격에서도 4타수 3안타의 좋은 타율을 기록했습니다. 그 다움 경기에도 역시 십자가 목걸이를 했는데, 그날도 좋은 수비를 하고 4타수 2안타에 홈런도 하나를 기록했습니다. 그 다음 시합 때에는 어떻게 잊어버리고 그 십자가 목걸이를 하지 않고 경기장으로 향하였습니다. 경기가 시작된 다음에야 비로소 십자가 목걸이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선수는 불안해하고 갑자기 자신감을 잃어버립니다. 그날 따라 수비도 잘 안되는 것 같고 타석에 들어서서도 불안하고 초조합니다. 그에게 아내가 사랑의 마음으로 선물한 십자가 목걸이는 이제 저주꺼리가 된 것입니다. 그 십자가 목걸이의 있고 없음이 자신의 행·불행을 좌우한다는 맹신이 그로 하여금 십자가 목걸이의 저주 아래 놓이게 만드는 것입니다.

어떤 교인이 주일날 예배는 될 수 있는 대로 빠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주일을 거룩히 구분하고 주일에 하나님의 전에 나아가 예배드리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 그에게 기쁨을 주기 때문이 아니라, 언제 한 번 주일날 교회에 가지 아니하고 다른 일을 하였더니 차 사고가 나서 커다란 손실을 입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 사고가 주일을 빠진 그에게 임한 하나님의 징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이후, 그는 기쁘고 감사한 마음이 아니라, 별로 가고 싶지 않은데도 하나님의 징계가 두려워서 주일예배에 참석합니다. 이 사람이 이러한 잘못된 미신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때, 주일예배가 이 사람을 저주 아래 놓이게 하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한국에서  메릴린 히키의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야 산다」(1997년 6월 출간)는 책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베스트셀러(bestseller)가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이에 편승하여 어떤 목사(이윤호)는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이렇게 끊어라」(1999년 2월 출간)는 책을 내놓았습니다. 이러한 책들이 인기 있는 배경은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잘 되기를 원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현실이 그들의 마음들을 그 책들로 향하게 합니다. 교회를 꼬박꼬박 출석하고 신앙을 붙잡고자 하는데도, 여전히 사업에 실패하고,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질병이 항상 그 사람과 가정을 따라 다니는 것은 그 사람의 가정에 대대로 흐르는 저주가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의 주장인즉, 예수님을 주로 영접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의 가계에 조상대대로부터 흐르고 있는 저주를 끊어버리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놓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가계에 흐르는 저주가 무엇이며, 그 원인이 무엇인지 찾아야 하며, 이를 끊어버려야지만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책들이 그 독자들을 저주 아래 놓이게 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주장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무효로 만드는 것이며(nullify),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와 이에 따르는 하나님의 축복(갈 3:9 참고)을 부정(否定)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도 이 세상을 살 때에는 병듦 가운데, 가난한 가운데, 어려운 환경 가운데 살아가도록 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그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그러한 삶을 사셨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러한 생을 살다가 갔습니다. 물론 모든 크리스천들이 반드시 이러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여건이라면, 그 어려운 여건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하는 마음이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이 세상의 길지 않은 생은 하나님께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를 원하시는 것은 우리 하나님의 자녀가 각각 달리 주어진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을 잘못 알고 믿는 우리의 잘못된 지식과 종교행위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선하신 것들을 저주꺼리로 만들 수가 있습니다.

   10절: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라고 한 말씀을 보며 율법이 저주를 준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이와 같이 불완전하고 저주의 원인을 제공하는 율법을 주신 하나님도 불완전하시고 잔인하고 포악하신 분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이 왜 “저주 아래 놓인다”고 말씀하는가 바로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이 저주(κατάρα)는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끊어지는 것’을 의미하는데 9절에 나오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와진 자”가 받을 복에 상반되는 개념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와진 자”에게 임할 가장 큰 축복이 하나님의 구원받은 자녀가 되는 것인데, 저주를 받은 자는 하나님 앞에서 그 생명이 끊어집니다.

바울이 10절에 인용한 율법책의 기록이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신명기 27장 26절에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신명기 27장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계명들은 부모를 경홀히 여기지 말 것, 근친상간의 일을 하지 말 것, 변태적인 욕망을 충족하고자 짐승과 교합하는 일을 하지 말 것, 무고한 자를 억울케 하거나 죽이는 일을 하지 말 것 등 당연한 금령이며 이를 어기는 자에게 임할 하나님의 저주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구태여 그런 계명들이 주어지지 않았어도 당연히 지켜야 하는 기본적인 도리에 관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 계명들을 지킴이 인간의 당연한 도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지키지 않을 때 그들에게 임하실 하나님의 저주가 두려워 지키는 것이라면 그들은 이미 율법의 저주 아래 놓인 자가 됩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와지고 구원받는’ 하나님의 복을 선포했는데, 하나님의 구원의 복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만으로는 부족하고, 부담스럽다고 하더라도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할 때 이 사람들은 율법의 저주 아래 놓이는 자란 것입니다. 율법 그 자체는 저주가 아닙니다. 다만 율법 지킴에 대한 부담이 저주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7장 7절에서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고 했고, 12절에서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고 했고, 14절에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11절: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기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갈라디아서를 통하여 반복하여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율법은 우리를 의롭게 하는 수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고, 여기에 어긋나는 삶이 죄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시기 위함(롬 3:20)입니다.

하나님 앞에 의로와지는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인데, 믿음으로 의로와진 사람은 (율법을 지키는 삶이 아니라) 믿음을 지키는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로와지고 구원얻는 바울의 가르침에 결정적으로 공헌하는 구약성경의 중요한 구절이 두 개 있는데, 하나는 갈라디아서 3장 6절에서 인용한 창세기 15장 6절의 말씀이요, 또다른 하나는 본절(11절)에서 인용한 하박국 2장 4절의 말씀, “그러나 오직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바울은 창세기 15장 6절과 하박국 2장 4절의 두 말씀을 결합하여 신약시대 하나님의 자녀를 위한 믿음의 교리를 정립하였습니다. 즉, ‘사람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의로 여기심을 얻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사람이 그의 믿음을 지키는 삶을 살아갈 때 이 사람은 이로 인하여 영원한 삶을 얻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로와지지 않는 것이 분명하니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 있는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좋을 듯합니다. 바울의 답은 명쾌합니다. 의로와짐에 필요한 요건으로 율법을 부담스럽게 생각하면서 지킬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칭의(稱義)와 구원(救援)의 요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논지를 따르면, 부담으로 여기며 하는 모든 행위가 우리로 저주 아래 놓이게 합니다.
교회 안에서 직분을 맡은 사람에게 그 직분의 일이 부담이 되고 마음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라면 하지 않아도 좋습니까? 대답은 “예”입니다. 그 이전에, 직분 감당함이 기쁨이 아니고 부담만 주며 그로 인하여서 적은 믿음마저 빼앗아가는 것이라면, 직분을 맡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하고 사랑하는 믿음으로 사람은 그의 믿음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기쁨으로 이루는 삶을 살게 합니다.

   12절: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레위기 18장 5절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모세를 통하여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 나는 여호와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율법을 온전히 행하는 자는 그 행함 가운데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온전히 행하는 자가 없으며 따라서 율법의 행함으로 말미암아 사는 자가 없습니다.로마서 3장 23절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더니”라고 했습니다. 또한 앞에서(갈 2:16) 바울은 이미 “울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실제로, 율법은 생명을 주는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율법은 단지 ‘하라’(Do), '하지 마라‘(Don't do)로 표현되는 외적 규범에 불과하며 그 자체로 어떤 생명을 주는 힘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13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신명기 21장 22-23절에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고 하신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악한 죄를 저지른 사람을 돌로 쳐죽이고 사람들 앞에 경계를 삼기 위하여 죽인 사람의 시체를 나무에 달아 보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흉악한 강도 둘과 함께 십자가에 죽임 당하심은 하나님의 저주를 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저주는 자신의 범죄함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대신하여“ 담당하신 것입니다.

아담과 그 아내 하와가 범죄함으로 사망의 저주가 그들에게 임하게 되고, 그들뿐 아니라 그의 모든 후손에게 임하게 되었습니다. 율법이 이스라엘에게 주어지기 전에 이미 사망이 인간 세상에 왔으나, 율법이 불순종이 죄인줄 알게 하는 것입니다(롬 7:7).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였으니”라고 말씀함은, 율법 아래에서 율법의 요구를 지키지 못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저주인 사망이 임하는데,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그를 바라보는 자를 피값으로 사셨습니다.
따라서, 사망의 저주가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임하지 않습니다.
로마서 6장 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서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의 의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바라보는 안타까움이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저주를 감당하심으로 죄를 죄 되게 하는 모든 율법의 저주에서 자유케 하셨는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에게 허락되어진 자유를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유대인들의 부추김을 받아 율법을 지키고자 함은 다시 율법의 저주 아래로 들어가고자 함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율법의 저주에서 그들을 속량하신 그리스도의 피를 헛되게 하는 것입니다.

   14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놓여있던 바 저주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실 뿐 아니라 저주를 변하여 축복되게 하십니다. 전에 이방인들이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에는 율법의 저주 아래 놓였던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죄와 사망의 저주아래 놓여 있었습니다.
이는 바울이 로마서 2장 12절에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고 말씀한 바와 같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를 때 그의 후손되게 하시고 아브라함으로 말미암는 복이 이들에게도 미치게 되었습니다.

“또한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하심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 약속하신 성령을 부어주시고(갈 3:2, 5 참고), 그 성령으로 그들의 삶을 인도하시고, 그들의 구원의 보증이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3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죄와 율법의 저주 아래 놓이시고 죽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죄와 율법의 저주 아래 우리를 놓을 필요가 없습니다. 율법이나 기타 부담에 우리를 맡기는 삶은 우리로 저주 아래 놓이게 할 뿐 아니라 의를 얻지 못하게 죄 가운데 살아가게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믿음의 삶은 우리를 저주에서 속량하여 자유인의 삶을 살게 하며 아브라함에게 허락되어진 축복을 얻게 하며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계에 흐르는 저주가 무엇인지 발견하고자, 그것을 끊을 수 있는 비법을 발견하고자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 」 등의 책을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 시간에 축복과 약속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하나님과 기도로 교통하는 것이 더욱 유익합니다.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 」 등의 책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을 두려움과 저주 아래 놓이게 할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우리와 우리의 가정에 흐르는 모든 저주를 끊어주셨습니다.
이를 믿으십니까?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구원과 축복이 임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교회나 가정이나 모든 일상의 삶이 자유자로서 믿음의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하므로,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들이 우리와 우리의 가정에 한없이 끼쳐지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의 믿음과 의” (갈 3:6-9)


“아브라함의 믿음과 의” (갈 3:6-9)

           
 
  3: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
     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1
성지(聖地) 이스라엘을 관광하려고 가면 여러 가지 특이한 것들을 접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관광 안내자들의 학벌이 상당히 높은 것에 놀라게 됩니다. 1999년에 이스라엘을 방문했을 때, 우리 목사 그룹(Princeton 동문들)의 관광안내를 세 사람이 맡았었는데 (전체 관광안내 1명, 갈릴리 유적지 관광안내 1명, 예루살렘 유적지 1명), 그 세 사람 모두 고고학자요 대학에서 강의를 맡고 있으며, 그 중에 두명은 이미 박사학위(Ph.D.) 소지자요 한 명은 박사학위 과정 중에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 사람들만이 고학력자가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관광안내원이 고학력자이며 고고학과 성경에 해박한 지식을 보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물론 하루 일당이 높아서 관광안내의 일을 하기도 하지만, 이들은 이스라엘의 유적지들(구약과 신약시대의 유적지 모두)을 외국관광객들에게 소개하는 일에 커다란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듯 합니다. 그들 거의 전부가 유대교에 속한 사람들이지만, 관광안내를 잘하기 위하여 신약성경(특히 복음서)에도 통달한 지식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행적, 예수님의 기도의 장소, 고난의 장소, 죽음의 장소, 승천의 장소와 이에 얽힌 사연들을 훤하게 알고 있지만, 정작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지 않은 사람들이요 하기에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가자(Gaza), 웨스트뱅크(West Bank) 등 분쟁지역을 제외하고는, 유대인들과 아랍인들의 거주 지역이 구분되어 있기는 하지만 큰 충돌 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관광안내를 맡은 사람들은 유대인인데 그 관광버스의 운전기사들은 아랍인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 중에 운전기사가 없어서가 아니라, 이렇게 함으로써 아랍인들 거주지역에 위치한 유적지나 식당을 들를 때에 적대감 없이 우호적인 대접을 받기 위한 것입니다.
원래 예루살렘을 위시한 유대 땅과 갈릴리 사이의 갈릴리 중간에 위치한 사마리아는 유다와 베냐민을 제외한 야곱의 열 아들들의 후손들(북방왕국 이스라엘)인 (주전 722년 앗수르의 침공으로 인해 혼합민족이 되어버린) 사마리아인들의 땅이었는데, 지금은 사마리아인들은 흔적이 없어져버리고 아랍인들이 사는 땅이 되어 있습니다. 이 아랍인들의 선조가 누군가 하면 바로 이스마엘입니다. 아브라함이 86 세 때 사라의 몸종 하갈에게서 얻은 그의 첫 번째 자식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갈대아-우르에서 부르실 때부터 반복하여 세 가지 약속을 주시는데, 곧 민족과 땅과 복의 약속을 주셨습니다(창 12:1-3) 아브라함이 처음 그의 본토 친척 아비집 갈대아-우르를 떠날 때의 나이가 몇살이었는지 성경은 밝히고 있지 않지만, 그곳을 떠나서 유프라테스(Euphrates) 강을 따라 한참 올라가다 있는 하란(Haran)이라고 하는 곳에서 머물다가 아비 데라가 죽자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에 순종하여 하란을 떠날 때의 나이가 75세인 것을 보면, 갈대아-우르를 떠날 때의 나이는 아마도 육십 세를 전후한 때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확신이 약해질 때쯤이면 하나님께서 한 번씩 나타나셔서 약속을 확인시켜 주시곤 했는데, 이러한 약속의 반복도 이행의 증거 없이 이십여 년이 지나가니깐 지치는가 봅니다. 너무나 오래 기다리다 보니까,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의 약속의 뜻이 우리가 생각한 것 하고는 다른 것이 아닌가?’라고 의문을 갖게 되는데, 흔히 이런 일에 밝은 쪽은 (성경에 의하면) 남자보다는 여자입니다.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민족에 대한 약속을 주신 것이니, 아마 당신 몸 하고만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구려. 우리 이렇게 무작정 기다릴 것이 아니라, 내 여종 하갈이 아리따우니 그를 취하여 자식을 생산해 보도록 하세요. 아브라함이 신중한 사람 같았으면 ‘더 기다려 보자고 하던지’ 아니면 ‘하나님이 다시 나타나시면 여쭈어보고 결정하자’라고 했을 터인데, 그는 아내 사라의 의견이 그럴 듯 하다고 생각하여 (창 16:2), 하갈과 동침하고 그가 잉태하여 자식을 얻게 되는데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하게 됩니다.
이스마엘의 탄생은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한 결과이며 인간의 생각이 하나님의 응답보다 앞섬에서 나온 결과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4장 21절이하에서 이 이스마엘을 가리켜 육체를 따라 난 자(4:23, 29)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약속을 따라 난 자가 아니요(4:23), 성령을 따라 난 자가 아니라(4:29)고 지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의 말을 더 경청하여 들었기에 육의 자녀 이스마엘을 얻게 되고 이스마엘의 후손들과 약속의 자녀 이삭의 후손들의 갈등은 이미 그 초기부터 시작되었는데, 그 이후 사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2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justification by faith)가 그의 전혀 새로운 궤변이 아님을 성경 아브라함의 예룰 갖고 설명합니다.

   6절: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6절은 창세기 15장 6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롬 4:3, 9; 약 2:23 참조).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때, 하나님은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신실한 분이심을 믿을 때, 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바라보고 인정하는 믿음을 하나님께서 의로 정하셨다(=여기셨다)는 뜻입니다.
“의로 정하셨다(=여기셨다)”고 함은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의 현재의 모습은 “하나님의 의”의 절대적 기준에 못미치는 것일지라도 “의로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의 일생이 행위로는 특별히 흠모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가나안에 기근이 심하여 애굽으로 내려가게 되었을 때 아내 사라의 아리따움으로 인해 남편이라고 하면 죽일까 두려워하여 누이동생이라 속이고 자진하여 애굽왕 바로에게 바칩니다(창 12:11-20). 물론 하나님의 간섭하심으로 아무런 일도 당하지는 않았습니다.
한 20년쯤 지나 가나안 남쪽 그랄 지방에 우거하게 되었는데 이번에도 아내 사라의 아리따움의 연고로 그랄 왕 아비멜렉을 두려워하여 사라를 아내라고 하지 않고 누이동생이라고 하므로 아비멜렉이 그를 취하고자 합니다(창 20:1-7). 이번에도 하나님께서 간섭하셔서 아무 일이 없게 하십니다. 첫 번째보다 두 번째가 더 무모한 것은, 이 일 얼마 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두 번이나 나타나셔서 ‘내년 이맘때쯤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창 17:15-22, 18:9-15)고 약속을 주셨었는데, 그 약속의 몸을 함부로 범하게 할 뻔했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커다란 잘못입니까?
이러한 반복되는 실수와 잘못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로 여기시고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신 까닭이 무엇입니까? 결정적으로, 아브라함은 그의 모든 실수 중에도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시고, 부르시고, 명하실 때, 그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의 명하심에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사람들 중에서도 교활하고 사기꾼 같은 야곱을 택하시고, 그를 들으시고, 축복하셔서 그에게 이스라엘--“하나님과 씨름한 자”라는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이름을 허락하십니까? 또 그로 선민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게 하십니까? 벧엘에서, 그리고 얍복강가에서 하나님께 전적으로 매어 달리는 하나님을 향한 그의 믿음을 기뻐 보신 까닭입니다.

   7절: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

유대인들은 그들만이 혈통을 따라 아브라함의 후손인줄 아는데, 바울의 이와같은 선포는 놀라운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선조로 삼으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의롭다 여김을 받는 사람들을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되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4장 11-12절과 16절에서 “저(=아브라함)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11절).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에게도니라(12절). ... 그러므로 후사에 속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16절).”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원래 하나님 밖에 있었던 자들이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아니더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고 하나님의 다스리심 안에 들어감이 얼마나 커다란 축복입니까?

   8절: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구약, 특히 야곱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그의 백성으로 택하신 이후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과 축복이 오직 그들에게만 있는 줄 믿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시기 훨씬 이전에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이방인에게 있을 복에 관하여 말씀하여 주고 계십니다.
창세기 12장 3절 (또 18장 18절과 22장 18절; 행전 3:25 참고)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방사람이라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을 때 하나님은 그 믿음을 의로 여기시고, 그에게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라 약속하신 복을 받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라합은 원래 여리고성의 창기로서 그 성의 함락과 함께 죽을 것이었지만, 그가 여호와를 믿고 바라보았기에 그 가정과 더불어 구원함에 이르고(수 6장, 히 11:31),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가는 영광을 얻었습니다(마 1:5).
룻은 이방 미디안 여자였지만, 시어머니 나오미의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었기에 “토지무를 자”(고알: לאוג)로서 구약의 예수님의 모형인 보아스와 결혼하고 예수님의 반열에 들어가는 축복을 얻었습니다(룻 4장).
니느웨의 백성들은 이스라엘의 적으로서 그들의 패역함이 하늘을 찌르기에 무너져내려야 할 자들이었지만, 요나의 외침을 듣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전적으로 간구하였기에 멸망치 않고 구원받는 복을 얻었습니다(욘 3장).

이방 사람들은 원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요, 이스라엘 밖에 있는 자들이요, 하나님도 없는 자들이었는데, 그리스도께서 오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매 그의 보혈의 십자가를 믿고 바라보는 모든 이방인들도 그들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와지고 하나님과 화목되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되었습니다(엡 2:12-18).

여기서 “성경”이라고 말씀함은 하나님의 말씀인데 본문에서 의인화시켰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속박과 의무규정으로서의 하나님 말씀을 언급할 때는 ‘율법(律法)’이라고 하고, 하나님의 순전하신 뜻을 의미함에는 ‘성경(聖經)’이란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 복음을 전했다”는 뜻은 복된 소식(gospel), 곧,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관하여 이미 창세기에서 언급하고 있음을 가리킵니다.

   9절: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바울은 7, 8, 9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은”(ἐκ πίστεως)이란 말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출석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믿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men of faith)가 되지 못함이 문제입니다.
믿음은 내가 가져야 되겠다고 하여 가져지는 것이 아니고 버려야 되겠다고 하여 버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수만 있다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중에 믿음을 마다할 사람이 없습니다.

믿음을 구하기 위해선 믿음이 무엇인지 알아야 할 것입니다.
믿음은 어떤 대상을 전적으로 신뢰(信賴)--의지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라고 함은 그가 신실하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여 그 약속을 바라보았다는 뜻입니다.
어떤 곡예사가 있었습니다. 그가 나이아가라 폭포(Niagara Falls) 위에 밧줄을 묶고 바퀴가 하나 달린 자전거로 미국에서 카나다까지 건너가겠다고 말합니다. 건너가는데 혼자 건너가는 것이 아니라 구경꾼들 중에 한 사람을 태우고 가겠다고 합니다. 구경꾼들은 이 사람이 얼마나 밧줄을 잘 타는지 압니다. 그가 사람들 앞에 밧줄타기 공연을 한 이래 한번도 실수한 적이 없음도 압니다. 그러나, 그가 이제 나이아가라 폭포를 동반하여 건너갈 자원자를 찾음에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때 한 소년이 나섭니다. 나를 태우고 건너가라고 합니다. 구경꾼들이 놀라는 눈으로 그를 바라봅니다. 소년이 대답합니다. “나는 나의 아버지를 믿어요. 그는 한 번도 실수한 적이 없어요.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밧줄을 잘 타는 사람이에요.” 이와 같이, 나의 생명까지 내어맡길 수 있음이 전적인 신뢰의 믿음입니다.

저는 아이들을 종종 야단치는 편인데, 어떤 때는 아이가 왜 야단을 맞고 있는지 모른다고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야단을 치고 나서도 너무 심하지 않았나 싶기도 한데, 야단을 맞은 아이는 10분도 못되어 웃는 얼굴로 쪼르르 달려와서 무엇을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는 아빠가 왜 자신을 야단쳤는지 잘 모르지만, 아빠를 전적으로 신뢰하기에 야단맞을 일이 있어서 야단맞았지 생각한 것이고, 자신을 야단치는 아빠가 자기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음을 알기에 지금 웃는 얼굴로 앞에 나온 것입니다. 이것이 아빠와 자녀의 신뢰의 관계입니다. 그러나, 아이가 사춘기의 틴에이저(teenager)가 되고 자기의 이성과 주장으로 판단하게 될 때에는 문제가 달라집니다. 믿음은 인간의 이성과 판단보다 앞선 전적인 신뢰입니다.

믿음은 순종(順從)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옳은 것 같긴 한데 그 말씀 아래 나를 두지 못하고 그 말씀을 따라 살지 못함은 아직 믿음의 마음이 내게 적거나 없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모세에게, 여호수아에게, 사무엘에게, 다윗에게, 그리고 선지자들에게 직접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내게 직접 나타나 말씀하시면 내가 듣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이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들이 적혀 있는 성경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데, 이 말씀 아래 자신을 두지 못함은 순종의 마음, 곧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실 때 모든 것이 믿어져서 그대로 순종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당장은 믿어지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지만, 식언치 않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순종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은 그 순종으로 인하여 후에 믿음을 갖게 되고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구약의 많은 사람들 가운데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순종의 믿음--믿음 이전의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사랑을 동반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나를 위하여 생명을 버리신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의미입니다.
또, 그리스도를 사랑하면 그분의 말씀을 지켜 행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14장 23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라고 말씀하시고, 24절에서는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사랑한다’는 말은 ‘믿는다’는 말로 대체가 가능합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킴이 의무감이나 억지로 되어지는 일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며, 그리스도의 말씀은 내게 율법적인 강요가 될 뿐입니다.

그러면 믿음은 어떻게 생깁니까?
에베소서 2장 8절에서 바울은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에 따른 하나님의 선물(gift)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사모할뿐 아니라 간구하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의 모습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겸비한 자를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사람 보기에가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낮아지고 겸손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의 마음을 선물로 주십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고, 순종할 수 없고, 또한 사랑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믿음의 사람은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으리라”고 약속을 주십니다.
믿음의 사람이 받을 복이 무엇입니까? 아직 내세와 영생이 계시되지 않은 구약시대에서 아브라함에게 허락되어진 복은 이땅에서의 부(富)와 장수(長壽)와 번영(繁榮)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세에서의 영원한 삶이 계시되어진 신약백성들에게 복은 영적인 것으로서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얻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 가운데 가장 큰 축복도 영적인 것이었습니다. 창세기 17장 7절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약속하시고 8절에 또다시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약속을 반복하십니다. “내가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는 축복보다 더 큰 축복이 없습니다. 아브라함과 그 후손이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들어갈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후손의 생사화복을 책임지시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로와진 사람에게 약속하시되 “내가 너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어떻게 압니까? 바울은 로마서 8장 16절에서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다스리심 가운데 거함이 믿는 자가 누릴 지고의 축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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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믿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시어 그리스도를 대속제물로 내어놓으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순종하고, 또한 사랑함이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믿음을 따라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여기십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여기시는 그 사람에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아니, 그리스도를 통한 계시로 인하여서 이 세상에서의 한정적인 축복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 나라에서의 기업을 주실 것입니다.

그 약속의 증거로서 우리 마음에 성령을 부어주시며 그분의 다스리심 가운데 우리를 두시며, 이를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 되심”을 보여주십니다.
아브라함의 믿음과 의를 따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여김을 받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