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July 27, 2014

“우상 숭배를 피하라!” (고전 10:14-22)

“우상 숭배를 피하라!” (고전 10:14-22)

           
 
  10:14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15   나는 지혜 있는 자들에게 말함과 같이 하노니 너희는 내 이르는 말을 스스로 판단하라.
       16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17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
       18   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을 보라. 제물을 먹는 자들이 제단에 참예하는 자들이 아니냐?
       19   그런즉 내가 무엇을 말하느뇨? 우상의 제물은 무엇이며 우상은 무엇이라 하느뇨?
       20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21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예치 못하리라.
       22   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
 

1
“나는 5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자 나의 전 생애가 변하였습니다. 이전에 욕망하던 것을 욕망하지 않게 되고 오히려 이전에 구하지 않던 것을 갈구(渴求)하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좋게 보이던 것들이 좋지 않게 보이고 이전에 재미있던 것들이 별로 재미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것들이 나에게 중요해지고 소위 행운의 무지개를 좇는 삶이 허무(虛無)하게 생각되었습니다. 나의 인생관(人生觀)과 가치관(價値觀)이 뒤바뀌는 것이 곧 예수믿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이는 19세기말 러시아의 대 문호(文豪) 톨스토이(Leo Nikolayevich Tolstoy, 1828-1910)가 「나의 회심」이란 글에서 한 말입니다.

톨스토이는 41세에 이미 불후의 대작「전쟁과 평화(War and Peace)」(1869)를 출간하고, 후에 「안나 카레니나(Anna Karenina)」(1877) 등을 발표함으로써 불세출(不世出)의 인물이 되지만 소피 베르(Sophie Behrs)와의 결혼생활(1862년 결혼)은 극도로 불행하였습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내가 죽는 날까지 그녀는 나의 목 주위를 누르는 한 바위일 것이다. 나는 나의 목을 누르고 있는 이 바위로 인해 익사(溺死)당하지 않는 법을 터득해야 할 것이다.”라고 함으로써 그의 결혼생활이 얼마나 부담스러웠던지 극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아내와의 불화(不和), 가족들과의 마찰(摩擦)과 특히 내면의 자신과의 갈등(葛藤)이 톨스토이로 새로운 진리와 평안을 발견하고자 하는 노력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하여 60세쯤에 복음서를 읽다가 이상적인 하나님의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크리스천이 되었는데,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은 그의 삶이 이로써 새로운 국면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가 표현한 대로 그의 인생관과 가치관이 변한 것이 사실입니다. 대 문호로서 불후(不朽)의 명작을 남긴 그의 60년의 인생보다도 크리스천으로서 남은 생을 산 20년이 더 귀하고 값진 것이라고 그는 고백합니다.

톨스토이는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이후에 완벽주의의 삶을 살고자 합니다.
사냥을 포기하고, 담배와 술을 끊고, 육식을 하지 않고, 성적으로 금욕생활을 하기로 작정합니다.
그 는 71세에 쓴 그의 마지막 대작 「부활(Resurrection)」(1899)의 수익금 전체를 당시 짜르(Czar)에 의해서 박해를 당하고 있던 재세례파(Anabaptists) 단체인 두코보르(Doukhobor)를 돕는 일에 사용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산상수훈 해석으로부터 나온 그의 비폭력(非暴力) 철학은 간디나 마틴 루터 킹 등 비폭력을 주장하는 후세 사람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작 톨스토이는 크리스천이 된 초기의 기쁨은 다 없어지고 여전히 불행한 삶을 살아갑니다.
그 당시 부패한 러시아 정교회에 비난을 퍼붓다가 교회로부터 파문당하고, 완벽한 사람이 되고자 한 그의 모든 노력은 실패로 끝납니다. 결국 그는 명예도, 가족도, 재산도, 자신의 정체성도 잃어버린 채 마지막 평안을 찾아서 기차를 타고 한 수도원으로 향하다가 중(重)한 병(病)으로 한 기차역(Astapovo)에 내리게 되고 역장의 집에서 82세의 생을 마감합니다.

크리스천으로서의 삶 동안 톨스토이는 ‘복음의 이상대로 살수만 있었다면... 내가 그럴 수만 있다면’ 하는 독백과도 같은 소망을 한 순간도 놓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복음서에서 완벽한 인간상--하나님의 이상을 따르는 삶을 산 그리스도를 발견하였을 때 그는 분명히  크리스천으로서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의 남은 20년 여생을 통하여 그러한 삶을 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완전을 향한 성화의 삶이 불완전한 인간의 어떠한 의지와 노력으로도 가능치 않음을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의 완전으로 향한 삶을 추구(追求)하고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자신을 발견하면서 그 마음에 기쁨과 평안이 사라졌던 것입니다.
무엇을 하여야 합니까?
나의 부족을 끊임없이 고백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나의 부족한 모습을 내가 용납해야 합니다. 나의 부족을 이미 하나님께서 용납하여 주셨습니다. 내 스스로가 온전한 크리스천의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교만이며, 거기에는 주님이 역사하실 공간이 없습니다. 한편으로는 성화의 삶을 살기를 원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부족함을 끊임없이 고백할 때, 그때 비로소 성화의 삶을 살기를 원하는 우리를 성령께서 도우사 그 길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게 하십니다.

2
14절에서 바울은,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shun the worship of idols)고 권면합니다.
6장 18절에서 “음행을 피하라(shun immorality)고 한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앞에서(6:18) ‘음행을 피하라’고 한 까닭은 창기와 합하는 자는 창기와 한 육체(flesh)를 이루고(6:16) 그리스도와 합하는 자는 그리스도와 한 영(spirit)을 이루기(6:17) 때문입니다.

‘우상 숭배를 피할 것’은 같은 원리가 여기에 적용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상 숭배(idol worship)를 하는 자는 우상과 합하여 한 육체를 이루고, 주님을 예배하는 자는 주님과 합하여 한 영을 이룰 것입니다.
우상(idols)이 무엇입니까?
고린도 교인들에게는 그들이 예전에 찾던 그리스 신들--제우스, 아프로디테 등의 신들입니다.
음란은 이들 신전에서 여사제들과 행하는 행위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구체적으로 지적하시는 것은 재물(mammon, 마태 6:24)이요, 가족입니다. 또한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하였던 세상에서의 영광과 권능이 우리의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헬무트 틸리케(Helmut Thielicke)는 “성공에 대한 숭배는 악마가 가장 주도면밀하게 조장하는 우상 숭배의 형태이다.”라고 말합니다.

우상을 피하기를 ‘원함’이 우리에게 있지만, 우상을 피할 수 있는 ‘능력’은 나약하고 유혹이 많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어떻게 피할 것입니까?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기도함으로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여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우상을 피하기를 원함은 있지만, 번번히 우상을 숭배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15절에 “나는 지혜(知慧) 있는 자들에게 말함과 같이 하노니 너희는 내 이르는 말을 스스로 판단하라”고 말씀합니다.
같은 말씀을 반복하여 읽고 같은 설교를 반복하여 듣지만, 듣고 깨닫고 돌이킴이 없는 사람은 지혜 있는 자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무어라고 말씀하십니까?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마태 11:14, 13:9; 마가 4:23)고 하십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하나님의 지혜가 그 가운데 있어서 듣고 행하는 자입니다.

16절에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고 말씀합니다.
우리 믿는 성도들의 진정한 축복은 세상의 것으로 인하여 일시적으로 얻을 수 있는 축복이나 쾌락이나 평안과는 다른 것입니다. 믿는 사람에게 허락되어진 축복은 그리스도께서 그를 위해 흘리신 피를 마시고 찢기신 살을 먹음입니다. 이로써 그는 그리스도와 연합(聯合)하게 되며 영원한 생명(生命)과 평안(平安)을 얻을 수 있습니다.

17절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한 떡에 참예함이라”고 말씀합니다.
믿는 우리 모두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 수만큼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고(the body of Christ), 한 몸을 이룬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한 생명의 떡’(One Bread of Life)이신 ‘한 그리스도’(One Christ)가 필요합니다.

18절에 “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을 보라. 제물(祭物)을 먹는 자들이 제단(祭壇)에 참예하는 자들이 아니냐?”고 말씀합니다.
유대인들 중에 성소를 지키는 아론 지파의  제사장들이 제단에서 제물을 먹는데(레위기 7:6; 고전 9:13), 이들이 하나님의 제단에서 하나님께 드려진 제물을 먹으면서, 성소를 나가서는 제우스 신전에 드려진 제물을 먹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식물(食物)을 먹는 자는 온전히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하여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과 연합한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19절에 “그런즉 내가 무엇을 말하느뇨? 우상의 제물은 무엇이며 우상은 무엇이라 하느뇨?”라고 질문합니다.
바울이 우상 숭배를 피하라고 한 것이 실제로 하나님이외의 다른 신이 있기 때문입니까?
세 상의 헛된 것을 좇는 마음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명령을 온전히 따르지 못하고 그곳 거민들의 신들인 바알과 아세라, 그모스, 밀곰 등을 숭배하였지만 그들이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실재하는 신들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20절에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고 말씀합니다.
20~21 절에 ‘귀신’이란 단어가 네 번이나 나오는데 헬라어는 다이모니오이(δαιμόνιοι, demons)로서 ‘마귀(혹은 악마’)의 의미입니다. 한국의 조상들에게 드리는 제사와는 약간 구별됩니다. 물론 어떤 사람이 조상신이 축복을 줄 것이라고 믿고 제사를 드린다면 그 조상신은 여기서 표현하는 귀신(demons)에 포함됩니다.

구약시대에는 제사장들만이 하나님의 성소에서 하나님께서 제사장들에게 식물(食物)로 마련하여주신 제물을 먹을 권(權)이 있었는데, 신약시대에는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한 모든 믿음의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나누는 성찬에 참예함으로서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위해서 공급하여주시는 식물(食物)을 먹습니다.
따라서, 신약시대에는 제사장들뿐아니라 모든 믿음의 성도들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교제(交際)는 오직 하나님과만의 교제가 되어야 합니다.
하 나님의 전을 섬기는 구약의 제사장들이 나가서 제우스 신전을 섬기지 못하듯이, 하나님 전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하나님의 식물을 먹는 고린도 교인들은 나가서 제우스 신전이나 아프로디테 신전에서 이들 우상들에게 예배드리지 말아야 할 것이며 이들의 제물을 먹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는 곧, 제우스 신전이나 아프로디테 신전을 찾는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의 원수인 사단-마귀를 섬기며 마귀와 교제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믿 는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고 하나님과 교제하는데 나아가서 세상사람들이 즐기는 일을 여전히 행하고 있다면, 이는 바로 하나님과 원수된 마귀를 위하는 일이며, 한편으로는 하나님과 교제한다고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마귀와 교제하는 행위입니다.

21절에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예치 못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잔(盞)과 상(床)은 연합의 행위를 의미합니다. 주님의 성찬에 참예함으로써--주님의 살과 피를 먹음으로써 주님과 연합한 자는 마귀의 잔을 마시고 상에 참예하는 일을 피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할 때, 이 사람은 주님과 연합하고 주님과 교제하는 자같으나, 기실은 그렇지 아니하고 여전히 마귀와 연합하고 마귀와 교제하는 자입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의 말씀은 참으로 간단하고 명쾌한 말씀이지만 지키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mammon)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재물(財物)로 번역된 맘몬(mammon)은 셈족 계통의 단어(Semitic word)로 돈(money) 혹은 부(riches)를 뜻하는데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감을 방해하는 모든 우상을 상징합니다.

하나님과 온전히 연합(聯合)하고 교제(交際)하고 있습니까?
여러분과 하나님의 연합하며 교제함을 방해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지 못하고 계십니까?
제우스 신전이나 아프로디테 신전을 드나들지 않고 그 신들에 바쳐진 제물을 먹지 않은 우리에게도 우상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로 하나님 밖으로 향하게 하며,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여 하나님과 온전히 교제하지 못하게 하는 것들이 우리의 우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것, 하나님보다 먼저 선택하고자 하는 것--이것이 우리의 우상(偶像)입니다. 재물, 시간, 학문, 배우자나 자식 등등이 우리의 우상이 됩니다. 우리에게 재물, 시간, 학문, 배우자와 자식등과 함께 즐거워할 축복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다만, 그 모든 축복과 즐거움과 평안이 주님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22절에 “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고 반문합니다.
성도가 여전히 하나님의 집과 우상의 집을 드나들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한편 또한 우상과 교제할 때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들을 향하여서 노를 발하십니다.
성도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진노하실 때 그에게 이를 감당할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은 우리의 주님이시요 창조주시며 우리는 그의 백성이요 피조물인 까닭입니다.

3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합니까?
우리는 우상 숭배함을 피하여야 할 것입니다.

왜 그리해야 합니까?
우상 숭배하는 자는 주님과 온전히 연합하는 자가 아니요, 온전히 교제하는 자가 아니요, 따라서 주님의 축복과 영광에 온전히 들어갈 수 없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우상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감을 방해하는 것들이요, 우리로 하나님 밖으로 향하게 하며, 하나님 주변에서 서성거리게 만드는 것들입니다.
사람마다 우상이 다른데, 우리로 하나님보다 먼저 선택하게 하는 것들과 하나님 밖에서 우리를 유혹하는 것들은 모두 우상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우상 숭배를 피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의지(意志)로는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의지로 하고자 할 때, 그 삶은 비록 그리스도의 온전을 향한 삶이라고 할지라도 고통(苦痛)이요 좌절(挫折)이요 번민(煩悶)입니다.
그 삶은 하나님을 위한 삶같지만 평안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자유자의 기쁨이 없습니다.
톨스토이의 예에서와 같이 평안을 구하고자 서성거리며 이곳 저곳을 헤매일 수밖에 없습니다.
음란을 피하는 일이나 우상 숭배를 피하는 일이나 오직 성령의 도우심으로 가능합니다.

어떻게 성령의 도우심을 얻을 수 있습니까?
겸손한 심령으로 우리의 무능력과 약함을 고백하는 기도와 간구로서만이 가능합니다.
내가 날마다 죽노라(고 전 15:31)고 고백한 바울과 같이 우리의 무능력과 약함 가운데 우리의 자아와 의지는 매일 죽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고 우리를 도우실 때, 우리는 비로소 음란을 피하고 우상 숭배의 마음과 행위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날마다 우리의 약함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능력의 도우심을 간구함으로써 우상숭배를 멀리 하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고전 10:1-13)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고전 10:1-13)

           
 
  10:1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3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磐石)은 곧 그리스도시라.
       5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고로 저희가 광야(廣野)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6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 한 것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7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8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
       9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10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11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13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堪當)하게 하시느니라.
 

1
새들백교회의 담임목사인 릭 워렌(Rick Warren)은 그의 저서 「새들백교회 이야기(The Purpose Driven Church)」에서 교회성장을 파도타기에 비유(比喩)합니다. 릭 워렌목사님의 말대로 파도를 일으키는 것--얼마나 큰 파도인가--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인간이 파도를 일으킬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성령의 파도가 우리에게 밀려올 때 어떻게 그 기회를 잘 이용하여 멋진 파도를 타고 교회가 성장하도록 성령의 역사에 순응(順應)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파도타기를 할 때, 처음부터 큰 파도를 잘 타는 사람이 없습니다. 파도타기 판(board)이 뒤집혀져서 바닷물 속으로 빠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허다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실망하지않고 낙담하지않고 또 다시 성령의 파도가 밀려오기를 기다리며 다시 파도타기를 실행합니다. 마침내, 그가 파도타기에 성공하여 파도 위를 달릴 수 있을 때, 과거의 실패를 거울삼아서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고 더욱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하면 됩니다.

릭 워렌목사님은 그의 책에서 “하나님은 언제나 불완전한 상황에서 불완전한 사람을 통해 그분의 뜻을 이루신다.”고 기술합니다. 전도서 11장 4절에 “풍세를 살펴보는 자는 파종하지 아니할 것이요 구름을 바라보는 자는 거두지 아니하리라.”고 했는데, 영어성경 Living Bible은 이를, “완벽한 조건을 갖추기를 기다린다면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느니라.” (If you wait for perfect conditions, you will never get anything done.)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하고자 계획하고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인 것이 확실할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보고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in season, out of season)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는 불완전(不完全)한 사람들을 통하여 그 일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가나안 땅을 40일동안 정탐하고 돌아온 열두명 중에 하나님께서 왜 여호수아와 갈렙은 축복하시고 나머지 열명과 출애굽할 때 이십 세 이상이던 이스라엘 장정들은 다 광야에서 죽게 하셨습니까?
인간의 계산과 논리로 따지면 그들이 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람들이요, 여호수아와 갈렙은 무모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불완전한 상황 가운데서도 불완전한 사람들을 통하여 완전을 이루시는 능력의  주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사람들을 보기를 원하시고 이러한 사람들을 축복하여 주십니다. 불완전한 환경과 약한 사람들을 바라보는 자는 실패하지만, 그러한 동일한 상황과 사람들에 둘러쌓여서도 완전하시고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는 하나님의 축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2
1~2절에서 바울은,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말씀합니다.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라고 함은 무슨 뜻입니까?
너희가 ‘반드시’ 알기를 원하노니 하는 뜻입니다.
바울이 고린도교인들에게 알게 하기를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광야 40년동안 겪은 사건들입니다.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은 우리의 인생과 비교됩니다.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지도자로 삼으시고 모세와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는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밤에는 불 기둥으로: 출 13:20-22)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모세가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매 홍해가 갈라지고 그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여 건너갑니다.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καὶ πάντες εἰς τὸν Μωϋσήν ἐβαπτίσθησαν ἐν τῇ νεφέλῃ καὶ ἐν τῇ θαλάσσῃ) 했는데, 좀더 원어에 가까운 번역은, “다 구름과 바다에서 ‘모세 속으로’ 세례를 받고(=세례되어지고)”입니다. 영어성경(RSV)은 “and all were baptized into(unto, KJV) Moses in the cloud and in the sea"라고 번역합니다.
여기에서 ‘세례’의 의미는 연합(聯合) 혹은 헌신(獻身)입니다. 즉, 구름의 인도와 홍해 바다를 지날 때 이스라엘 백성은 모두 지도자인 모세와 연합하고 그에게 순종(順從)함으로 홍해를 건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흔히 홍해를 건너는 사건을 물세례에, 요단강을 건너는 사건을 성령세례에 비유(比喩)합니다.
홍해를 건너는 사건은 보고 믿는 믿음이요 요단 강을 건너는 사건은 보지 않고도 믿는 믿음인데, 영적 요단 강을 건너서 영적 가나안 땅인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보고 믿는 믿음 위에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는 믿음을 요구합니다. 이것이 구원받기에 합당한 믿음입니다. 진정한 구원은 출애굽하여 광야생활을 함이 아니요, 요단을 건너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5장 31절은,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베푸신 큰 일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 종 모세를 믿었더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순종 혹은 청종의 믿음은 오래 지속되지 않습니다. 출애굽기 15장에서의 순종의 믿음은 위기가 지난지 오래 되지 않아 또 다른 것에 대한 불평과 원망으로 바뀌었으며(출 16:2, 7, 8, 9, 12) 모세의 말을 청종치 않았다(출 16:20)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3~4절에서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 말씀합니다.
오랜 유대 전승(傳乘)에 의하면 (H. Strack & P. Billerbeck, 「Kommentar zum Neuen Testament aus Talmud und Midrasch」), 이스라엘 백성이 행진할 때마다 신령한(spiritual) 초자연적인(supernatural) 반석(바위)이 그들을 따라다녔는데 모세가 이 반석을 지팡이로 칠 때 물이 솟았다고 합니다.
바울은 이 유대 전승을 인용하여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따라다닌 반석이 그리스도라고 주장합니다.

이스라엘이 먹은 ‘신령한 식물(食物)’은 만나와 메추라기요, ‘신령한 음료(飮料)’는 반석에서 솟아난 물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4장 14절에서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하시고, 6장 35절에서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하시고, 6장 51절에서는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고 하시고, 6장 55절에서는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고 말씀하십니다.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이 머고 마신 신령한 식물과 신령한 음료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예표합니다.

5절에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의 광야교회(church in the wilderness) 교인들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대다수가 젖과 꿀이 흐르는 하나님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애굽을 출발하여 홍해를 건너고 시내산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1년을 머물던 모세와 이스라엘은 전열을 재정비하여 가나안을 향하여 출발하는데, 출발하기에 앞서서 레위 지파를 제외하고 나머지 열두 지파(요셉의 두 지파, 므낫세와 에브라임)를 계수하였더니 그 수가 603,550명이었습니다(민 1:46, 2:32). 이 중에서 가나안에 들어간 사람의 수가 몇 명입니까?
단지 두 명--여호수아와 갈렙--뿐이었습니다.
나머지 603,548명은 어찌 되었습니까?
그들의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광야에서 쓰러져갔습니다.
그들이 교인이 아니었습니까? 사도행전 7장 38절에서 스데반이 증언하는 대로 남자 장정만 60만이 넘는(여자와 아이들을 다 합치면 200만이 넘는) 그들은 ‘광야교회의 교인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구약시대에는 율법으로 심판하셨습니까? 율법 지키기가 어려워서 두 명만 구원받았습니까?
아닙니다. 그때에도 ‘믿음으로’ 심판하셨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믿음의 사람이었기에 하나님이 구원하시고 나머지 60만 이상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바라본다고 말하였지만 실제로는 믿음이 없었기에 요단을 건너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은 것입니다.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고로” 했는데,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의 믿음 없음이요 모세와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을 발하는 것입니다.
지도자를 못 믿는다는 것은 지도자를 지명하신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으로 연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6절에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 한 것과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이 즐겨 행한 악이 무엇입니까?
광야생활 40년이 온통 악한 것들이었습니다. 민수기에 나타난 기록들을 보십시오.
그들에게 불신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탐욕이 가득합니다. 모세와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을 발합니다.
그들에게 감사와 기쁨의 삶이 없었습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오래참으시는’ 하나님께서 오죽하시면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만 남기고 60만 이상의 장정을 광야에서 죽게 하셨겠습니까?
이스라엘이 광야교회에 속하였었지만 구원에 이르지 못한 것같이, 큰 교회이든 작은 교회이든, 부흥하는 교회이든 그저 그런 교회이든 교회에 속한 것만으로는 나의 구원의 보증(保證)을 삼을 수 없습니다.
무엇이 나의 구원의 보증이 됩니까?
내 안에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불평과 원망의 입술이 아니라 감사의 입술이 되게 하시며, 두려움과 낙담의 마음이 아니라 기쁨과 찬송의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이 있는 사람의 삶입니다.
광야에서 망한 이스라엘의 사건이 고린도 교인들뿐 아니라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우리 모두에게 거울이 되어야 합니다.

7절에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출애굽기 32장 6절에 “이튿날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슨 사건입니까?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언약판을 받기 위하여 시내 산 꼭대기에 올라갔는데 내려옴이 더디니까 아론과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들어놓고 이를 여호와라고 칭하고 그것에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즐기는 장면입니다.
참 여호와 하나님은 그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는데, 이 금송아지 여호와는 만만하게만 보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죄악으로 가득찬 마음이 금송아지--가짜 여호와 앞에서 가볍고 방자하고 음탕의 흥이 솟아납니다.

8절에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민 25:9에는 이만 사천 명)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고 말씀합니다.
민수기 25장에 기록된 사건입니다.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 때 모압 여자들과 음행(淫行)하기를 시작하여 결국에 그들이 섬기는 우상 바알브올에게 절하고 부속됩니다. 이를 보시고 하나님이 진노하사 이만 삼천 명(혹은 이만 사천 명, 민 25:9)을 염병(染病)으로 죽게 하십니다.
여기서 경계하는 간음(姦淫)은 육체적인 것 위에 영적인 것으로서 하나님을 섬김에서 돌이켜 이방의 우상을 섬기고 짝함입니다.

9절에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고 말씀합니다.
민수기 21장의 사건입니다. 에돔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통과를 허락하지 않으므로 에돔 땅을 둘러 행진하게 되니 백성들이 그 길이 멀고 거칠며 먹을 것이 없음을 인하여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을 발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불뱀을 보내어 이스라엘을 물게 하시고 죽게 만드십니다.
이에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피할 길을 내어주십니다.
곧, 모세로 하여금 장대에 청동 뱀을 만들어 달게 하시고 ‘이를 바라보는 자는 나으리라’는 처방을 주십니다. 이 하나님의 처방의 약속을 믿고 장대 위의 놋뱀을 바라본 자는 살고, 이 약속을 믿지 않은 자는 그들의 불신의 마음으로 인하여 죽었습니다.

하나님을 시험한 이스라엘을 살리신 이 장대 위의 놋뱀도 그리스도 사건의 예표(豫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요한복음 3장 14~15절에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장대 위의 놋뱀을 바라보는 자마다 나음을 얻은 것같이, 믿음으로 십자가 위에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자마다 영생을 얻습니다.

10절에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민수기 16장의 사건을 봅니다.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과 온이 모세와 아론의 지도체제에 불만을 갖고 원망하며 대적할 때 땅이 갈라져서 그들을 삼키게 하시고 그들과 같이 한 자들 250인을 불로 소멸(燒滅)하십니다.

11절에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되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런 일들(these things)이란 곧, 악을 즐겨하는 자(6절), 우상 숭배하는 자(7절), 간음하는 자(8절), 주를 시험하는 자(9절), 원망하는 자(10절)들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아니하시므로 소멸당함이며, 우리의 거울이 되고 경계꺼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광야 40년 길에서 멸망당한 자들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기록입니다.
주님 재림을 기다리며 우리 인생을 살아가고 교회생활을 하지만 믿음의 삶이 아니라 여전히 악을 즐기고, 우상 숭배하고, 다른 세상 것과 짝하여 간음하고, 주님을 시험하고 또 원망을 발하는 삶을 살아온 사람들은 이런 일들을 통해 자신을 말씀의 거울에 비춰보고 경계를 삼아야 합니다.

12절에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권고합니다.
우리 인생(人生)은 늘 약하고 불완전합니다.
우리가 홀로 서있는 줄 생각하면 그 다음 순간에 넘어지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구약의 위대한 인물 모세가 그랬고 또 엘리야가 그랬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고 신앙고백한 베드로의 믿음이 대단한 줄 알았는데 환난(患難)이 임하자 도망치고 주를 부인하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나는 약하고 부족한 종입니다.”고 ‘나’의 부족을 고백하고 주님을 더욱 의지하여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역사하기를 원하시는 성령님께 온전히 우리 자신을 맡겨야 합니다.

13절에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많은 사람이 자기가 당하는 근심거리가, 고통이 가장 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근심으로, 고통으로 인하여 믿음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하나님이 그 시험을 허락하신 까닭은 그가 더욱 큰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욥의 고통과 시련이 얼마나 컸습니까?
그러나, 그러한 시험이 욥을 무너뜨리고자 하신 것이었습니까?
사단은 이러한 시험으로 욥을 무너뜨리고자, 하나님의 사람을 패배시켜 하나님을 괴롭히고자 의도했지만, 하나님은 욥이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일 때 그 시험을 감당할 것을 미리 아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원망으로 불뱀이 그들을 물었을 때, 이제라도 하나님을 의지하고자 하는 자를 살리시기 위해서 장대 위에 놋뱀이라는 피할 길을 내어주셨습니다.
왜 사람이 괴로움과 낙망에서 헤어나지 못합니까?
이는 믿음이 있다고 하나 자신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자고한 마음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내어맡긴 사람은 고통하나 그 고통이 그를 아주 넘어뜨리지 못하며 슬퍼하나 그 슬픔이 그를 하나님 찾는 일에서 아주 돌아서게 하지 못합니다.

3
우리가 사는 이 인생은 광야(廣野)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광야에서 무언가 찾고자, 무언가 성취하고자 하지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때 그렇게 헤매이다가 쓰러져 갑니다.
어떤 사람은 이 광야 길을 나아갈 때에 광야교회들 중 하나에 속하여 그 교회에 속하였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위안을 얻고 그 광야에서 만사형통하는 축복을 얻고자 하지만, 진정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는 자는 그 삶이 공허일 뿐이요 그 교회에 속함이 그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감을 보장하여 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행악과 불평과 원망과 우상숭배와 세상과 짝함과 주를 시험하는 일에서 돌이켜 매사에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성경 속에 있는 것은 단지 남의 나라 역사를 공부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로서 우리 인생의 거울을 삼고 경계를 삼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바라기는, 여러분의 삶이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이 하나님을 인정하며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얻기에 합당하기를 원하며,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삶을 적극적으로, 그리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무한히 크시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 삶 가운데 나타나심을 경험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