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날의 임함” (살전 5:1-11)
5:1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2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3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4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5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6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찌라.
7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8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9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
10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11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같이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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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언젠가 한국에 나가 한 대형교회의 주일 낮 예배에 참석하였더니 마침 그날 목사님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제 임하실 것인지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대형교회였지만 주일 저녁예배나 수요 저녁예배 출석률은 저조하였던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주일 저녁예배 시간대나 수요저녁예배 시간대에 재림하셨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시작합니다. 그래야지만, 알곡 신자와 쭉정이 신자를 구별하실 수 있으니까 주일 저녁예배나 수요 저녁예배시간에 재림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주일저녁예배나 수요저녁예배에 교인들이 많이 참석을 바라는 바람으로 시작된 예수님의 재림의 시간에 대한 바람이 한 걸음 더 나아가 주일저녁이나 수요저녁이라는 시간의 예측이더니, 설교를 끝마칠 때쯤 되니까 확신 있는 단정으로 마무리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히 주일저녁이나 수요저녁에 재림하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알곡신자와 쭉정이신자를 가르실 것입니다.”
그 설교를 들은 교인들은 아마도 목사님 말씀에 뜨끔하여서 주일저녁예배와 수요저녁예배에 더 참석하게 되었을 줄 모르지만, 이것은 참으로 위험천만한 설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에 관해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외에 아무도 모른다고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알곡신자와 쭉정이신자의 구분은 어떤 사람의 주일저녁예배와 수요저녁예배 참석여부로 가려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녁예배에는 개인사정상 참석하지 못하였다고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확고부동한 알곡신자가 있을 수 있고, 수요저녁예배에는 참석하였지만 마음은 다른 곳에 있는 쭉정이신자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2세기 교회들을 이끌어가던 교부들도 예수님의 재림의 때를 예측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임할 것이라”는 구절(句節)에 주목하여, 도둑이 주로 밤에 찾아오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시는 때도 밤일 것이라 생각하여 “철야제”라는 것을 만들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유월절 저녁에 있었던 애굽으로부터의 이스라엘의 구원사건에 착안하여 부활주일 전야(前夜)에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하였습니다.
2
바울 역시 그의 생애 중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것을 소망하고 바라보았지만, 그것은 다만 그의 소망이요 기대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하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도적같이 임할 것이라 말씀합니다.
1-2절: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사람들은 지금이나 바울의 때나 불확실한 것을 싫어합니다. 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면 언제 재림하실 것인지 알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대답 이전에 예수님 자신의 대답이 무엇이셨습니까?
사도행전 1장 7절에서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가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4장 36-39절에서 예수님은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니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고 말씀하시고,
42-44절에서는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3절: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노아의 때에 하나님께서 세상을 물로 심판하시기 위하여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말씀하시고 노아가 산 중턱에서 방주를 짓고 있었지만, 초반에는 혹시 하나님께서 진짜 물로 심판하시나 경계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나 십 년이 지나고 이십 년이 지나고, 육십 년이 지나고 칠십 년이 지나도 청청(淸淸)한 하늘이 계속되니까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 이를 것임은 온통 망각하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해서, 그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죄악 가운데 여전히 빠져 하나님을 잊고 그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하며 배를 두드리는 삶을 살아갔습니다.
그런데, 백 년이 지나는 어느 날 하늘의 창들이 다 열리고 하나님께서 지면에 물을 쏟으시되 사십 일을 주야로 쏟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의 임함도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고 할 그 때에 도적같이 임할 것이며,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같이 그렇게 임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해산의 고통, 진통의 찾아옴이 갑자기 찾아옴에 비유하였습니다.
임신한 여자가 아이를 낳기 위하여서는 해산의 고통을 피할 수 없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아서 멸망을 당하기로 예정된 사람에게 멸망의 때와 그 고통은 피할 길 없이 반드시 찾아올 것임을 경고하고자 함입니다.
4절: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그리스도의 날의 임함이 여전히 어두움에 있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갑작스러운 것이요, 피할 길 없는 파멸이요 영원한 형벌이지만, 그리스도를 믿고 항상 영으로 깨어있는 자에게는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요 도적같이 임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5-6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찌라.
빛과 어두움의 구분은 사도 요한이 즐겨 사용한 표현이기도 합니다.
빛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기도 하며 그의 다스리시는 영역이라고 한다면 어두움은 사단이요 사단이 다스리는 영역입니다.
요한복음 3장 19-21절에서 예수님은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요한복음 12장 35-36절에서 예수님은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빛의 아들,” “낮의 아들”은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기에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잔다”고 함은 “자는 자들”이라고 할 때의 잠과는 구별되는 것으로서, 영적인 무감각, 무각성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빛의 아들,” “낮의 아들”은 영적으로 무감각한 자들이 아니라 깨어있는 자들입니다.
사람들이 잠을 자는 때가 밤이요 낮에는 깨어있는 것과 같이 낮의 아들은 영적으로 깨어 있습니다.
음란하고 부정한 일들이 주로 어두움 가운데, 밤에 되어지고, 낮에는 단정하고 근신하는 삶을 사는 것과 같이 낮의 아들, 빛의 아들의 모습은 단정하고 근신하는 삶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3장 11-14절에서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7-8절: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자는 자들과 취하는 자들은 영적으로 무감한 자들이요 깨어있지 않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밤에 속한 자들이라 음란과 방탕과 술 취함 가운데 있지만,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인 우리는 근신할 것이며,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갖고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살아갈 것입니다.
본서 1장 3절에서는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그리고 “소망의 인내”라고 표현했는데, 5장 8절에서는 “믿음과 사랑의 흉배”와 “구원의 소망의 투구”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6장 14절에서는 “의의 흉배”라고 표현했는데, 여기서는 “믿음과 사랑의 흉배“라고 했습니다. 흉배는 적의 공격으로부터 가슴과 등 등 생명을 보전하여주는 것인데, 우리에게 믿음과 사랑이 있을 때 우리는 사단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합니다.
투구 또한 적의 공격으로부터 머리라고 하는 치명적인 부분을 보호하여주는 것인데, 우리에게 구원의 소망이 있을 때 우리는 안전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늘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에베소서 6장 17절에서도 “구원의 투구”라고 했습니다.
9절: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시는 뜻은 우리를 노하심 즉,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주시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 곧 구원함에 이르게 하심이라고 설명합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인간을 멸하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할 수 있으면 많은 ㅅ람들이 그를 바라보고 믿어 구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것입니다.
해서, 아직 우리에게 시간이 있을 때, 주님의 날이 이르기 전에 우리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함으로 우리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10절: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바울은 말씀하는데, 여기서 “우리를 위하여”라고 함은 우리를 죽은 자 가운데 아주 버려 두시지 아니하며 “우리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살아있든지 아니면 잠자고 있든지 그와 함께 살게 하시기 위하여” 죽으셨다는 의미입니다.
11절: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같이 하라.
우리 믿는 사람들은 혼자 신앙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공동체’의 신앙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만일 세상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핍박을 당하고, 믿음을 지키고, 충성을 다하는 사람이 ‘나 혼자’라면 이것처럼 어려운 일이 없을 것입니다.
상황이 그러하다면 그러한 상황에서 천국이 아무리 좋다고 들었더라도 자신의 믿음을 지키고자 하는 삶을 살지 못할 것입니다.
엘리야가 얼마나 믿음이 좋은 사람이었습니까? 그런데도 그가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하나님의 작고 세미한 음성이 그를 부르실 때에 무어라고 대답했습니까?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히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나의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왕상 19:10, 14).
그의 마음 상태가 어떠했습니까? 그는 이세벨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기가 두려워서 차라리 죽기를 간구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믿음의 동지들과 더불어 하는 삶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으며 위로를 받으며 또한 위로하고, 격려를 받으며 또한 격려하며, 권면을 받으며 또한 권면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안에서 덕을 세우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1장 5-9절에서 베드로는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고 말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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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날이 언제 임함이 우리 주님을 믿고 우리의 믿음으로 깨어있는 사람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늘 낮 가운데 행하고 근신하고 서로 권면하고 덕을 세우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님의 날의 임함이 축복임을 믿으며, 해서 주님의 날을 소망 중에 영적으로 깨어서 기다리는 한 사람 한 사람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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