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April 3, 2016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 21:15-23)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 21:15-23)
         
 21:15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20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러라.
     21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23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1
어떤 사람에 대해서 잘 알고 친해지기 위한 방법이 여럿 있습니다. 정기적으로 자주 만나는 것, 여행을 같이 하고 잠자리를 같이 하는 것, 목욕탕에 같이 가는 것, 또는 식사를 같이 하는 것 등입니다. 이런 일들을 통하여 그 사람의 고상한 면뿐만 아니라 약점 혹은 나쁜 버릇이나 성격까지도 알게 됩니다. 그의 장점뿐 아니라 단점까지 알면서 그 사람을 좋아할 수만 있으면 이로써 진짜 친하게 됩니다.
이 여러 가지 사람과 친해지는 방법들 중에서 비교적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식사를 같이 나누는 것입니다.
특히 동양에서는 식사 문화가 발달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정적(政敵)과 어떤 사안을 협상할 때도 식사를 같이 하고자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딱딱한 분위기를 피하고 좀더 열린 마음으로 대화함으로써 좋은 성과를 얻기도 합니다. 요즘은 정치인들이나 사업가들이 골프회동을 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아직까지는 식사회동이 더 많습니다.

식사를 같이 함으로써 서로 친하여지고 원만한 협상의 결과를 얻는 것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계약, 예수 그리스도와 제자들 간의 새로운 계약관계에서도 행하여졌고 지금도 행하여지고 있음을 봅니다.
창세기 15장 7절 이하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계약관계를 체결합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과의 계약을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암염소와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준비하고 그 모든 짐승의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습니다(창 15:9-10). 창세기 15장 17절에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타는 횃불”은 하나님의 임재의 표시로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차려놓은 음식을 기쁘게 받으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의 ‘식사계약’입니다. 이어 18절에 보니까,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言約)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라고 축복의 말씀을 주십니다.

모세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맺은 계약도 ‘식사계약’입니다.
출애굽기 24장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짐승(=소)의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8절)고 말한 다음 9-11절에,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인이 올라가서 이스라엘 하나님을 보니 그 발 아래에는 청옥을 편 듯하고 하늘같이 청명하였더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이스라엘의 지도자와 언약(言約)을 맺으시되, 식사 자리를 허용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식사 자리에 같이 하심은 하나님 편에서 친근감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만의 하나님이 아니시라 온 이스라엘의 하나님 되심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구약(舊約)을 영어로 “Old Testament"라고 하고, 신약(新約)은 “New Testament"라고 하는데 ”Testament“는 라틴어 ”Testamentum“에서 온 것으로 바르게 번역하면, 각각 옛 계약(=언약)새로운 계약(=언약)이라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리고 모세와 이스라엘 지도자들과 ‘식사계약’을 하신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제자들과 새로운 계약“을 맺으실 때 식사를 같이 하는 자리를 마련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하시던 밤에 제자들과 함께 만찬을 나누시던 자리에서 제자들과 새로운 언약을 맺으십니다. 새로운 언약을 맺으시되, 모세가 짐승의 피를 뿌림으로써 하나님과의 계약을 선포한 것과 같이(출 24:8), 예수님은 식후에 자신의 피의 잔을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심으로 “새 언약”을 선포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2장 20절에 예수님은,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고전 11:25 참조). 그리고, 그날 밤에 제자들에게 그들이 지켜 행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하시고, 또한 그들이 자신들의 계약을 성실하게 이행할 때 하나님께로부터 그들에게 임할 축복이 무엇인지 알게 하십니다. 아니, 그 이전, 예수님의 삼년여 공생애 기간 중에 제자들과 함께 다니시고, 함께 주무시고, 수도 없이 함께 식사를 하시면서, 그들과 친해지시고 신약백성들에게 필요한 새로운 계약의 자리를 마련하셨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들이 행해야 할 것이 무엇이며 그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축복이 무엇인지 새로운 계약 내용을 알려 주셨습니다.
지금도 믿는 성도들은 주 만찬(또는 약식으로 성찬)의 식사에 참여할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와 제자들간의 ‘식사계약’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아직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씀하실 때 식사를 통한 친밀한 계약관계에 들어가기를 원하십니다. 요한계사록 3장 20절의 그리스도의 초청을 음미하시기 바랍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주님을 영접하는 사람과 새로운 계약관계에 들어가실 터인데, “더불어 먹는” 친근한 ‘식사계약’ 관계에 들어가십니다.

구약과 신약에서 하나님과 그 자녀간의 계약 혹은 언약은 쌍방계약입니다. 한쪽이 계약을 이행하지 못할 때, 다른 쪽이 자신의 약조를 파기하여도 할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이스라엘 지도자들과 맺은 계약은 조건부, 제한적 계약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지 아니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도 그들에게 예비하신 축복을 거두셨습니다.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비롯한 믿는 성도들과 맺는 계약은 “무조건적, 영원한 계약”이라고 칭합니다. 이 계약을 “무조건적, 영원한 계약”이라고 하는 것은 성도들이 계약을 지키지 않아도 좋다는 뜻이 아니라 다소 실수를 하여 죄와 허물을 범하여 계약을 잘 이행하지 못하여도 하나님 앞에 나아와 죄를 고백하고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 긍휼과 용서로 자녀를 다시 받아 주시며 주님의 언약의 약속을 끝까지 온전히 이행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무조건적, 영원한 계약의 예는 노아와 맺은 언약 이외에 다윗과 맺은 계약이 그것입니다. 따라서, 다윗은 그의 임종을 맞이할 때 사무엘하 23장 5절에서 “내 집이 하나님 앞에 이같지 아니하냐? 하나님이 나로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사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케 하셨으니 나의 모든 구원과 나의 모든 소원을 어찌 이루지 아니 하시랴?”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다윗의 자손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상대방의 계약 위반으로 당신의 축복의 약조를 깨지 아니하시고 다윗의 가문에서 촛대를 옮기지 아니하시고 그 가계를 축복하시되 메시아, 그리스도를 그 가문에서 나오게 하시기까지 축복하셨습니다.

2
최후의 만찬을 나누시면서 제자들과 새로운 계약을 맺으셨던 예수님께서 고난당하시고 죽으시고, 죽으신지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부활하신 날, 그리고 일주일이 지난 다음에 예루살렘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 후에,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갈릴리 디베랴 바다(또는 호수)에 나타나셨습니다.
디베랴 바닷가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잡은 생선을 좀 가져 오라”(요한 21:10)고 말씀하시고, 식단을 마련하신 다음에 “와서 조반을 먹으라”(요한 21:12)고 제자들을 다시 식사 자리에 초청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조반 식사를 같이 하셨다는 것은 용서와 친근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은, 예수님의 부활을 보기는 하였지만 아직도 약간은 의기소침해 있는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에게 새로운 계약의 의미를 일깨워주시기 위함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본 그들이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았지만, 그들에게 맡기신 사명을 생각나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들이 있어야 할 곳이 어디입니까? 함께 모여 기도하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제자로 부르시기 전의 상태로 돌아가 있었습니다.

15절: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오늘 대화는 다른 모든 제자들을 위함도 되지만, 그 중에 특히 베드로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베드로가 누구입니까? 모든 제자들 가운데 자신의 의협심이 제일이요 주님으로 향한 충성심이 최고라고 늘 스스로 자부하던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26장 33절(마가 14:29)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했고 35절(마가 14:31)에 “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말했었습니다. 누가복음 22장 33절에는 “저(=베드로)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붙잡히시던 그 밤과 새벽 사이에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하되, 처음에는 그냥 부인하고, 두 번째는 맹세하여 부인하고, 세 번째는 저주하고 맹세하여 부인함으로써 그 강도를 더해갔습니다(마태 26:70, 72, 74).

이러한 베드로에게 주님께서 세 번의 연속적인 질문의 첫 번째 질문을 던지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세 번의 질문이 동일한 질문의 반복인 것 같지만 예수님의 의도는 세 번이 각각 다르십니다.
첫 번째 질문은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하기 전의 베드로의 심중을 드러내시는 질문입니다.
아마 동일한 질문을 그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기 전에 받았었다면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하였었을 것입니다. “주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물론이죠. 제가 주님을 이 모든 사람들보다 더 사랑함을 주님께서 잘 아시지않습니까?” 그의 대답은 자신만만하며 당돌하기까지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죽기까지 사랑함에 실패를 경험한 현재의 베드로는 대답합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ναὶ κύριε, σὺ οἶδας ὅτι φιλώ σε).
그가 주님을 부인하기 전에 했음직한 대답과 현재의 대답 사이에는 두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는데, 첫째는 “이 사람들보다 더”라는 주님의 질문에 확신있게 “예 제가 이 사람들보다 더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 무모함이 그에게 없어졌습니다. 둘째는 예수님께서는 “어떤 때나 어떤 환경에도 절대적으로 나를 사랑할 수 있느냐?”를 물으시기 위해서 “아가파오”(ἀγαπάω)라는 단어를 사용하셨는데, 베드로는 감히 이 단어를 사용하지 못하고, “제가 주어진 형편과 때에서 최선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할려고 노력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하기 위해서  한정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필레오”(φιλέω)의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이에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사명을 맡기십니다.
베드로가 무모하기까지 한 자신감으로, “예, 제가 주님을 사랑하되 다른 사람들보다 더 사랑하며 주님과 함께 죽을 준비가 되어 있을 정도로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할 마음이었을 때에는 아직 당부하지 않으시던 사명입니다.
만일 그 이전에 이러한 사명을 맡기셨으면, 그는 이 사명 감당함을 자기의 능력과 자기의 기분으로 그리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감당하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쉽게 팽개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패를 경험한 그에게는 그의 능력과 감정을 더 이상 의지할 수가 없습니다. 그의 부족을 알기에 오직 주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할 따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족함을 허락하시고 이를 우리로 인정하게 하는 것도 감사이고 은혜인 것은, 바울이 고린도후서 12장 9절에서 말씀한 대로,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의 약한 데서 온전하여지기” 때문입니다.

16절: 또 두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두 번째 질문하실 때에는 첫 번째 질문에서 사용하셨던 ‘비교’의 의미의 “이 사람들보다 더”를 빼고 질문하십니다.“이 사람들보다 더” 주님을 사랑하지 못했음을 베드로가 잘 압니다.
그러나, 두 번째 질문에도 예수님은 “어떤 때에나 어떤 환경에서도 나를 사랑하되 죽기까지 사랑하느냐?”의 의미의  “아가파오”(ἀγαπάω)라는 단어를 사용하셔서 질문하십니다. 이는 베드로의 마음을 괴롭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가 그럴 수 없는 제한적이고 부족한 사람인 것을 철저히 인정케 하기 위함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사랑’에 관한 세 번의 질문의 강도는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한 부인(否認)의 강도의 역순(逆順)입니다. 베드로는 부인하고, 맹세하고 부인하고, 저주하고 맹세하고 부인하는 순으로 강도를 더해가면서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모른다’고 말했는데, 예수님은 질문의 강도를 감해가면서 다른 제자들 앞에서 베드로의 ‘허물의 짐’을 덜어주십니다.

17절: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양을 먹이라.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질문하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질문에는 이제 “이 사람들보다 더”라고 하는 비교(比較)의 부담(負擔)도, “아가파오”(ἀγαπάω)라고 하는 “무조건적이요 절대적인 사랑”의 부담(負擔)도 빠져 있습니다. 현재의 베드로가 할 수 있음직한 대답의 수준에서 “필레오”(φιλέω)-곧, “너에게 주어진 조건과 환경 가운데 최선을 다하여 나를 사랑하겠느냐?”라는 질문을 하십니다.
그런데, 주님의 이 세 번의 반복되는 질문이 자신의 부족함과 허물 많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베드로의 마음을 (적어도 이 질문을 연속적으로 받는 당시에는) 불안하게 하고 아프게 합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근심하여 대답합니다.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κύριε, πάντα σὺ οἶδας, σὺ γινώσκεις ὅτι φιλώ σε). ‘주님께서는 저의 모든 것--마음으로부터 제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가도 아시고, 그러나 저의 사랑의 표현이 환경 가운데 얼마나 부족한 것인 줄도 이미 보아서 아시지 않습니까?’라는 대답입니다.
자기의 부족과 허물을 인정하는 베드로에게 세 번째로 사명을 당부하심으로 베드로와의 계약(covenant)을 마감하십니다.

18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예수님은 베드로가 그의 사명을 감당할 때 그의 생이 어떻게 될 것임을 예언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예언하신 대로 헤롯 아그립바 1세의 박해(주후 39-44년) 때에 그의 원치 않는 감옥에 투옥되고(행전 12:3-19), 또한 후에 네로 때(64-66년경)에는 체포당하여 네 팔을 벌리고 십자가에 거꾸로 달리는 처형(외경 베드로행전 35장)을 당하였다는 전승(傳乘)이 있습니다.

19절: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주님의 사명을 감당할 베드로 앞에 어려움과 죽음의 위협이 항상 도사리고 있지만, 그러한 중에도 담대할 수 있는 것은 대장되신 주님께서 그를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ἀκολούθει μοι, Follow me)”고 말씀하십니다. 때로는 주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사명이 불가능하거나 힘든 일처럼 보이지만, 그 일을 가능케 하는 것은 나의 능력이나 재주가 아니고 주님의 인도하심입니다. 나에게 사명을 맡기신 주님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인도하십니다.

20절: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풍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러라.

예수님께로부터 그가 장차 어떻게 될 것임을 들은 베드로가 돌아보니 함께 걷고 있는 베드로와 예수님을 따라오는 제자가 있었는데, 그는 바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였습니다. 요한복음은 베드로와 경쟁적인 관계에 있었던 다른 제자를 “예수의 사랑하는 제자라고 표현함으로써 그 제자가 ‘요한 자신’(어떤 성경학자들은 제삼의 제자로 추론하기도 하지만)임을 암시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이 제자는 요한복음 13장 23-25절에서 예수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워 주님을 팔 자가 누구오니이까?라고 질문할 정도로 예수님과 친근감이 있었던 사람이며, ‘예수님의 시체가 무덤에 없다’는 막달라 마리아의 보고를 들은 다음에 베드로와 함께 무덤으로 뛰어가되 달리기 시합을 하는 것같이 빠르게 달려갈 정도로 베드로와 경쟁관계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21절: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그 제자의 장래는 어떻게 될 것인지 베드로의 호기심이 발동합니다.
주님께서 나는 어떤 모양의 순교를 당하겠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럼 이 사람의 운명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또한 신앙생활을 하면서 끊임없이 주위 사람들과 비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내 능력이 이만한 데 내가 왜 저 사람보다 부족한 삶을 살아가는거야?’
‘내 믿음이 저 사람의 믿음보다 나은데, 하나님은 왜 나보다 저 사람을 더 축복하시는거야?’
이러한 끊임없는 비교가 하나님께 감사보다는 원망과 불평의 마음이 들게 합니다.
비교는 사단의 미혹의 절대적 수단입니다.
이 비교가 최초의 사람, 하와를 넘어지게 하였습니다. 창세기 3장 5절에 옛뱀의 미혹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그것(=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하나님이 아심이니라.” “하나님과 같이 되어”-즉, “하나님만큼 너희도 지혜로와질 것”이라는 하나님을 비교의 대상으로 삼은 것에 하와가 넘어진 것입니다.

22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뜻과 계획은 상대적이거나, 비교적인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독특하고 개별적인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향하신 인생의 계획은 다른 사람보다 낫다 못하다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과 뜻을 내가 잘 지켜 행하고 있는가 못한가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너는 네 할 일이나 잘하라”(Mind your own business)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는 나를 따르라”(σύ μοι ἀκολούθει: You, follow me)고 다시 한 번 권고하실 때, “너는”(σύ)에 힘을 주어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도 말고 다른 사람의 장래의 일에 지나친 호기심도 갖지 말고, ‘너는’ 나를 따라오기만 하면 된다는 권고의 말씀입니다.

23절: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라.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베드로의 입을 통하여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죽지 않을 것이라고 다른 제자들에게 전하여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의 뜻은 그것이 아니라 너는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은 어떠한 생을 살도록 계획하시고 허락하시든지 신경쓰지 말고 너의 감당할 일이나 잘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베드로가 네로의 기독교 핍박시에 체포되어 주후 65-66년경에 죽음을 당한 반면에, 요한은 밧모섬에 유배된 적이 있긴 하지만, 소아시아의 에베소에서 90이 넘도록 장수하면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다가 100년을 전후하여 비교적  평안한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3
디베랴 바닷가에 나타나신 예수님은 제자들과 조반을 나누심으로 다시 한 번 그들에게 친근한 모습으로 다가오시고 그의 피와 몸으로 맺으신 새로운 계약을 확인하셨습니다.
베드로를 위시한 다른 제자들이 주님과 쌍방계약관계에 들어가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사랑의 행함이었습니다. 이러한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일을 감당하는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날도 성도들과 계약관계를 갖고 계십니다.
그리고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그들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우리들은 우리의 약함과 부족함과 허물을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는 주님께서 우리들과 함께 하시며 우리를 늘 인도하시고 감찰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아직 주님을 영접하지 않고 있는 사람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며 그와 식사계약관계를 맺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가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영접하면 일상의 삶 중에 그와 함께 먹고 마시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십니까?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며 함께 생활하는 삶을 즐길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사랑합니까?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시는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명을 감당하되 부족함을 염려할 것이 없음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온전케 하시며, 위로하시며, 격려하시며,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Sunday, March 27, 2016

“엠마오로 향하는 길에서” (누가 24:13-35)




                             “엠마오로 향하는 길에서” (누가 24:13-35)
           
 
 24:13 그 날에 저희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촌으로 가면서
     14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15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16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 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18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우거하면서
        근일(近日) 거기서 된 일을 홀로 알지 못하느뇨?
     19  가라사대 무슨 일이뇨? 가로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여늘
     20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21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救贖)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된 지가 사흘째요
     22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23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으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24  또 우리와 함께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의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25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28  저희의 가는 촌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같이 하시니
     29  저희가 강권하여 가로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 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저희와 함께 유하러 들어 가시니라.
     30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31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32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33  곧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 한 사도와 및 그와 함께한 자들이
        모여 있어
     34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는지라.
     35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1
사람의 태어남과 죽음에 관해서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Leo Tolstoy, 1828-1910)는, “아기는 울고 태어나지만 주위사람들은 이를 즐거워하며, 주위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지만 그는 웃으며 간다.”고 했습니다.
이 사람이 진정 그리스도인일 때 이 말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태어남은 미지의 세계로 옴이요 죽음은 또 다른 미지의 세계로 옮겨감입니다.
사는 것이 항상 즐거운 일은 아닌데, 아니 고생과 슬픔의 연속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그 삶에 미련과 애착을 갖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는, 죽음 후에 그에게 다가올 미지의 세계가 어떤 것인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존재의 정지가 초기불교에서는 열반(涅槃)의 상태에 들어가는 최고의 경지라고 했는데, 많은 사람들에게 이것은 허무일 뿐입니다. 존재의 정지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혹시 지옥에 떨어지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엄습하고 또 그보다는 생과 사의 갈림을 경험해야 하는 처절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으로서 죽음 다음에 전개될 낙원이 얼마나 아름답고 즐거운 곳인지 알게 될 때에 그는 웃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낙원이 이렇게 좋은데, 내가 왜 아직까지 세상의 삶에 연연해 왔던가?’
그렇기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상을 이별하는 사람은 웃을 이유가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1장 23절에서 “내가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다”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죽음 이후의 세계를 바라볼 수만 있다면, 또 우리가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할 때마다 되뇌이는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는” 부활의 믿음이 있기만 하다면 우리는 이 세상을 좀더 담담하게, 그러나 부활의 그리스도를 적극적으로 증거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죽음 이후의 세계를 소망 중에 바라보는 사람에게도 죽음 그 자체에 대한 두려움과 고통까지 아주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 좋은 예를 우리는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에서 발견합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태 26:39);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마태 26:42)
세 번째도 이와 동일한 기도를 하나님께 올리셨다(마태 26:44)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기에 사람들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그에게도 고통으로 느껴지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통은 아침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여섯 시간동안 십자가에 매어달려 계신 처절한 것이기에 그의 기도가 더욱 간절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통이 혼자 견디어야 하는 장시간의 고통이라고 한다면, 그 고통당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고통과 외로움을 가볍게 하여주시기 위하여 우리와 늘 동행하여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믿는 사람들이 당하는 슬픔과 번민 중에만 같이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하늘나라로 옮겨가는 과정 중에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따라서, 우리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겪으신 철저한 버림당하심과 처절한 고통을 경험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습니다.

2
역대하 3장 1절을 보면, 솔로몬의 성전이 건축된 곳이 바로 “예루살렘 모리아산”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솔로몬 성전이 있었던 장소에 예수님 시대에 건축되고 있었던 헤롯 성전은 일명 “통곡의 벽”(wailing wall)으로 유명한 서쪽 벽만 남고 성전의 터에는 이슬람 사원인 오마르 모스크(Omar Mosque)가 지어졌습니다. 이 사원은 또한 “Dome of Rock"이라고도 하는데 그 이유는 그 안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올려놓고 번제로 드리려고 했던 큰 바위가 보존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골고다 언덕은 이 성전 터에서 불과 100미터도 안 떨어진 곳, 곧 모리아의 한 땅입니다. 여기에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이 모리아의 한 땅에서 하나님은 모든 믿는 사람들의 구약의 원형(Type)인 아브라함에게 과연 그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시기 위해서 그의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명하시고는 다만 그의 믿음의 고백-“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시리라”(창 22:8)-을 기뻐 받으시고는 이삭 죽임을 중지시키셨는데,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주시기 위해서 그의 독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위에 달리게 하시고 6시간의 기나긴 고통 끝에 죽게 하심으로 그의 인간 사랑하심을 확증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조만간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키실 분이라고 믿고 따라다니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상에서 죽으심은 참으로 황당하고 허망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처형되시기 전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때, 그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씀을 하셨는데, “잠시 후에는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할 것이요, 또 그 후에 잠시 나를 다시 보리라.”고 하시기도 하고,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라.”고 하시기도 하셨지만,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길가에 늘어선 군중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던 그였습니다. 군중들이 종려나무를 흔들면서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소리쳤습니다. 덕분에 제자들도 으쓱한 기분으로 예루살렘으로 들어왔는데, 이스라엘 회복은 고사하고 강도들과 함께 범죄자의 한 사람으로 십자가형을 받다니 이것이 웬 말입니까?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지 며칠 지나지도 않아, 또 저녁에 만찬을 잘 들고 여느 때와 같이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는 줄 알았는데 한 밤중에 그들이 왕으로 받들리라 생각했던 그 예수님께서 아무 힘없이 붙잡히시고, 붙잡히신 날 아침이 오자 십자가에 달리십니다. 이제라도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시어 모든 로마병정과 군중들 앞에서 ‘이보란 듯이’ 내려오시지 않나 기대도 해보았지만, 오후 세시가 되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누가 23:46; 시편 31:5 참조)란 마지막 말씀을 남기시고 숨을 거두십니다.
이를 멀리서 지켜보던 제자들은 실망과 좌절로 흩어집니다. 어떤 사람들은 일찌감치 고향으로 돌아가고, 또 어떤 사람들은 황망한 마음으로 맥없이 주님의 시체가 있는 예루살렘에 며칠 더 머물기로 작정합니다.

4 복음서를 종합해보면, 안식 후 첫날, 새벽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헤롯의 청직이 구사의 아내)와 요세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다른 여인들-살로매(예수님의 이모[요한 19:25];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요한 19:25)-이 예비한 향품으로 예수님의 몸에 발러주기위하여 갔으나, 예수님의 시신(屍身)은 간 데 없고, 두 천사(혹은 한 천사)가 이르기를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고 합니다.
여인들이 돌아가서 사도들에게 알리매 다른 사도들은 허탄한 말로 받아들이지만, 베드로와 요한은 달려가 무덤 속을 들여다보나 예수님의 시신을 쌓았던 세마포만 발견하고 기이(奇異)한 마음으로 돌아갑니다.

같은 날 오후-즉, 주일 날 오후-에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25리(약 10Km) 떨어진 엠마오(Emmaus)라 하는 촌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들도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실 때 한 자리 얻으려는 생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왜 고향이 아닌 엠마오로 가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그들은 이제까지 예수님을 따라 다니던 모든 의미를 상실한 상태입니다.

15-16절: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예수님께서 그들과 동행하시나, 낙담과 절망으로 그들의 눈이 가리워져 그들과 동행하시는 이가 예수님인 줄 알아보지 못합니다. 혹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얘기는 전해 들었지만 그것이 허황된 말로 여겨져서 곁에서 동행하는 이 사람이 부활하신 예수님이라고는 도무지 생각이 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비슷한 사람도 있구나’ 정도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마가(Mark)는 16장 12절에서 예수님이 “다른 모양(模樣)으로 저희에게 나타나셨다”고 기술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대화에 끼어드십니다.
 
17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서더라.

이에 두 사람 중 글로바라고 하는 사람이 설명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선지자로 여겼고, 이스라엘을 구속(救贖)할 자라고 바랐었다는 것,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에 의해서 사형 판결에 넘겨져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과 소문에 그가 다시 살아나셨다고 하는데 헛소문일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18-24절).

그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무지를 깨우치시고, 구약성경에 자기에 관하여 기록된 바를 풀어서 설명하고 가르쳐 주십니다.
 
25-27절: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가르치시기를 마치시고 예수님께서는 가시던 길을 더 가려는 것같이 하시는데, 그들은 예수님께 강권하여 그들과 함께 머무시도록 부탁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들과 유하러 들어가셨다고 했습니다.

30-31절: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영의 눈이 밝아지매 비로소 그들은 그들과 동행하신 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이심을 알게 되었으나 예수님은 이미 그 자리에 안 계십니다.

32절: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과 동행하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시고 구약성경을 풀어서 설명하여주실 때에 그들의 마음이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하였으며 떡을 떼어 주실 때에 모든 것이 분명하게 드러났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 사실을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는 사도들과 다른 제자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가던 길에서 돌이키어 방향을 바꾸어 어둠이 내리 깔리기 시작하는 길을 급히 달려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보니, 그곳에 있는 사도들과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나타나심’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그들도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어떻게 그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셨는지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 이후 2,000년 뒤 현재를 사는 믿는 사람의 부활하신 예수님의 체험이 또한 이와 같습니다.
엠마오 마을로 향하던 이 두 사람과 동행하시던 예수님께서 현재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낙담한 심정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 사람의 탄식에도 주님은 귀를 기울이십니다. 그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며 또한 떡과 잔을 떼는 성찬에도 함께 하셔서 우리의 영의 눈이 뜨임 받기를 원하시며,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져서 우리와 이제까지 동행하시며, 우리의 슬픔과 고통을 위로하시던 그분이 바로 부활하신 주님이심을 알아보기를 원하십니다.

교인의 생활을 오랫동안 해왔는데 영의 눈이 아직 뜨임 받지 못하였습니까?
글로바와 다른 제자가 ‘어떻게 영의 눈이 뜨임 받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본문 29절은 “저희가 강권하여 가로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했습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강권함--주님께 떼씀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너무 점잖게 믿는 사람에게는 주님의 은혜가 나타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주여, 주시든지 마시든지, 응답하시든지 마시든지 저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알아서 하십시오.’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알아서 안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동행하고 계신데, 우리와 동행하시는 예수님을 ‘간절히’ 알고자, 발견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기에, 우리와 함께 유하시기를 간구하는 청원이 없기에 예수님께서 우리 문 밖에 서 계실지 모릅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글로바와 다른 제자가 영의 눈이 뜨임 받고 그들과 동행하시던 분이 예수님이신 것을 알았을 때 그들은 엠마오로 향하던 길을 돌이켰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은 슬픔과 고통의 빛을 띠고 가는 세상으로 향한 길이라고 할 것입니다.
엠마오로 무슨 중요한 볼 일로 가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일을 다 제쳐놓고 급히 “주님이 부활하시고 그들에게 나타나셨다.”는 기쁜 소식을 증거하려고 예루살렘의 제자들에게 달려갔다고 했습니다.

수가성 우물가에서 물을 깁던 사마리아 여인은 그에게 물을 청하시는 분이 그리스도임을 알고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리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요한 4:28)라고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하였고,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믿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우리는 이 기쁜 소식을 주위에 증거하여야 합니다.

3
어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상징(symbol)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하여 책을 썼는데, ‘우주시대에 살고있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는 안되고, 이는 다만 구약시대의 엘리야-엘리사 스토리(story)를 그리스도-제자들의 상황에 맞춘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또 어떤 성경학자는 예수님이 실제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상처를 입으신 것은 사실이지만, 아리마데 요셉의 무덤에 하루를 머무신 후에 에센인들(Essenes)이 거하는 쿰란(Qumran)으로 가시어서 그곳에서 결혼하고 자녀를 낳으면서 살았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기적도, 예수님의 부활도 믿겨지지 않을 뿐입니다. 합리적인 자신의 사고의 틀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은 그들에게는 사실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요즘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부활을 믿으십니까? 부활의 주님이 이 시간도 여러분 삶 가운데 주인이 되심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이 기쁜 소식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간급한 마음으로 증거하여야 할 것이며, 사마리아 여인처럼 이웃들에게 소리쳐서 증거하여야 할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말할 때,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라.”(14절) 하고 또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17절) 합니다.
바울의 이 말씀이 아니더라도 예수님의 부활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 죽으심으로 실망과 좌절감으로 뿔뿔이 흩어졌던 그들이 다시 모일 수 있었던 원동력이 무엇입니까? 이는 그들이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보아온 사건보다 더 큰 사건이 아니고는 불가능합니다. 그들이 한 차례가 아닌 여러 차례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할 수 있었기에 가능하였던 것입니다.
누가는 사도행전 1장 4절에서 “예수님께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40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고 증언합니다.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고 성경을 믿는다고 말함은 거짓말을 기록한 인간의 말을 믿는 어리석음입니다.

기독교는 체험에 바탕을 둡니다. 예수님의 행적이 그러하였고,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승천하심을 체험한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흩어졌다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모여 거기에 유하면서 성령의 강림을 기다리고, 성령을 체험하여 능력을 얻은 후 다시 흩어져서 부활의 주님의 증인이 됩니다.

우리는 어느 곳을 향하여 어디쯤 가고 있습니까?
글로바와 다른 한 제자와 같이 그들이 따르던 주님을 죽음에 내어준 상실감과 낙담의 마음으로 여전히 엠마오를 향하여 난 길을 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기쁨으로 만사(萬事)를 제쳐놓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급히 달려가고 있습니까? 그리고 기쁨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 모두가 부활의 주님을 체험할 수 있기를 바라며, 그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웃에게 부활의 주님에 관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