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균의 경제원리” (고후 8:7-15)
8:7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8 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다른 이들의 간절함을
가지고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코자 함이로다.
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10 이 일에 내가
뜻만 보이노니 이것은 너희에게 유익함이라.
너희가 일년 전에 행하기를
먼저 시작할뿐 아니라 원하기도 하였은즉
11 이제는 행하기를
성취할지니 마음에 원하던 것과 같이 성취하되 있는 대로 하라.
12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
13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平均)케
하려 함이니
14 이제 너희의 유여(裕餘)한 것으로 저희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저희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하게 하려 함이라.
15 기록한 것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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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Karl
Marx, 1818-83)와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95)가 가장 이상적인 경제체제라고 믿었던 공산주의적 사회주의가 동독의 서독으로의 흡수통일, 소비에트연방(USSR)의 붕괴 등으로 무너져 내린 것은 자기 능력을 인정받기 원하고 개인소유를 원하는 인간의 본성에 비추어 아마도 당연한 귀결이었다고 할 것입니다.
어린아이를 키우는 부모는 아이가 말을 하기 시작하는 두 살 전후부터 내 것, 네 것을 구분하는 것을 보게 되고 ‘내 것’에 대한 강한 소유욕을 표현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람들에게는 본능적으로 자기 것을 주장하고 움켜쥐고자 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두세 살에서 시작되는 이 사유욕(私有慾)은 나이가 들어도 줄어들지 않고 죽을 때까지 계속됩니다.
그런데, 능력이 많은 사람이나 능력이 적은 사람이나 능력껏 일하되 동일한 것으로 분배하고 사유를 인정하는 대신에 국가가 모든 것을 소유하는 공산주의적 사회주의는 각 개인에게 그 이상(理想)만큼이나 매력적인 것은 되지 못하였습니다. 열심히 일하여도, 능력이 많아도 동일한 분배를 받는데 능력이 많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더 많은 수확을 거두고자 열심히 일할 사람이 없습니다. 공산주의가 이상적인 제도이긴 했지만 실패한 것은 인간의 본능을 과소평가한 까닭입니다. 국가가 강압적으로 강요한다고 하더라도 한계가 있습니다. 원래의 공산주의는 '국가도 계급도 없는' (stateless and classes) 능력껏 일하고 필요한대로 분배받는, 그러나 개인의 소유 (private ownership)가 아니라 공동소유 (common ownership)가 원칙인 사회입니다.
그 반대편에 있는 자본주의의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빈익빈 부익부’(貧益貧富益富)의 사회가 되어간다는 것입니다. 자본주의가 이제까지 등장한 모든 경제체제 중에서 가장 좋은 것임이 사실이지만 이 역시 완전하지 않아서 부자는 점점 부자가 되고 가난한 자는 점점 더 가난한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또 다른 경제체제를 제시합니다. 이 경제체제는 자본주의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교회들을 중심으로 자본주의 체제의 단점들을 보충하여 줍니다. 적어도 같은 교회를 다니는 성도들 간에서는 교회를 통한 (빈부에 대한) 평균화 노력으로 ‘빈익빈 부익부’의 문제를 줄일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예에서 볼 수 있는 공생주의(Commonism)가 바로 그것입니다(행전 2:44-47, 4:32-35). 이것이 공산주의와 다른 것은 각 개인의 능력과 재능에 따른 경영과 소유를 인정하는데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14-30절)에 나오는 달란트의 비유가 그렇습니다. 능력이 있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많은 것을 경영하여 더 많은 것을 이윤으로 남길 수 있고, “자발적으로(voluntarily)",
"기쁜 마음으로(joyfully)" 자기의 유여한 것을 적게 남긴 자에게 나누어줍니다.
21세기 현재의 지역교회들도 사도행전에 나오는 자발적 공유의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소유는 그대로 유지하되 자신의 유여한 바를 자발적으로, 기쁜 마음으로 헌금이나 기타의 형태로 교회를 통하여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필요에 따라” 나눠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므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통하여 하기를 원하셨던 나눔의 사역을 감당하게 됩니다.
바울은 우리 믿는 사람들이 “빚진 자”(롬 8:12; 13:8)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빚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빚은 하나님께 진 것인데,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사랑과 은혜의 빚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의) 빚은 곧 주위의 가난한 자들에게 진 빚이라고 말씀합니다. 로마서 15장 25-27절에서,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유대인으로 오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복음)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말씀합니다.
물질적으로 가난하나 영적으로 부요한 자는 영적으로 빈곤한 자에게 영적인 빚을 진 자요, 영적으로 가난하나 물질적으로 부요한 자는 물질적으로 빈곤한 자에게 물질적인 빚을 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은 흔히 ‘나는 가진 게 아무 것도 없어서 나눠줄 것이 없어’라고 말하는데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3장(1-10절)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 기도 시간에 성전에 올라갈 새 미문이라 하는 성전 문에 나면서 앉은뱅이가 구걸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가 그에게 이르기를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말씀할 때, 앉은뱅이는 즉시 일어나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하나님을 찬미하였다고 했습니다.
송명희 시인이 작사한 복음송 「나」의 가사를 보면,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뇌성마비 중증의 환자인 송명희 시인에게도 다른 사람들보다 유여(裕餘)한 것이 있고 따라서 그것을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 나눠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유여한 것--물질적으로 혹은 영적으로--이 무엇인지 적극적으로 찾아보아야 할 것이며 나누기를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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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절에서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하여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도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풍성한 연보를 바울에게 전하여준 마게도냐 교회들의 모범적인 헌신에 관하여 언급한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모금의 필요성을 설명합니다.
7절: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바울은 그들에게 작정한 돈을 내라고 강요하거나 명령하는 대신에, 그들의 선한 것에 호소(呼訴)합니다.
“믿음”(고전 13:2)과 “말”과 “지식”(고전 12:8) 등은 고린도 교인들이 갖고 있던 장점들 성령의 은사들입니다. 그 위에 고린도 교인들에게는 (지나치리만큼) 은사들에 대한 간절함이 있었고 바울을 향한 (편지를 쓰고 있는 지금은 다소 빛이 바랜) 사랑함이 있었습니다.
그와 같이 성령의 은사와 사모함과 사랑함에 풍성한 것같이 “이 은혜”--즉,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서 모금하는 일에도 “풍성하게” 하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은혜”가 인색하지 않고 풍성하였던 것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눈에 보이는 형제를 위해서 하는 “이 은혜”에 인색함이 아니라 풍성한 것으로 하라는 당부입니다.
8절: 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다른 이들의 간절함을 가지고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코자 함이로라.
“내가 명령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함의 표현이 의무감이나 명령으로 되어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만일 그러하다면, 이는 율법주의로 흐르는 것입니다. 교회 봉사하는 일에 자원함이 없다든지, 헌금하는 일에 인색하더라도 구원 그 자체의 문제는 아닙니다.
바울이 마게도냐 교회들의 힘에 지나도록 넘치는 자원함을 언급한 것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헌금을 강요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선한 마음에 호소하여 그들도 하나님의 기쁨과 칭찬의 대상인 것을 확인시켜 주기 위한 것입니다.
모금에 참여하는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그가 내는 돈의 액수가 아니라, 그가 자원하는 마음, 기쁨으로, 주님께 받은 은혜를 돌려드리는 마음으로, 풍성한 마음으로 참여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너희의 사랑이 진실한 것인가 아닌가를 증명하는 것”이라고 바울은 말씀합니다.
9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부요하신 자”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자신이 하나님이십니다. 우주만물의 근원이시요, 이를 소유하신 부요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그 자신을 낮추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인간 가운데 거하시기 위하여 가난한 자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육신으로 세상에 오시되, 부유한 왕궁의 왕자로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가난한 목수 요셉과 마리아의 가정에 오실 때, 베들레헴의 한 여관 마굿간의 누추한 곳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의 생애는 가난으로 점철(點綴)된 것이었는데, 그는 공생애기간중 마땅히 누울 아늑한 방 한 칸도 소유하지 않으셨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와 같이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말합니다.
이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이 어떻게 우리로 부요케 합니까?
예수님께서 가난의 옷을 입고 우리에게 오신 것은 이제까지 심령이 가난했던 자이거나, 경제적으로 가난했던 자이거나 간에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을 듣고 이를 받아들이게 하기 위함이심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복음의 말씀을 듣고 그를 주님으로 영접함으로 심령이 부요한 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의 가난으로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하심”이라고 말씀함은 믿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고, 예수님의 가난의 의미를 생각하는 것이 부요해지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난케 되심으로 그를 바라보는 사람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고 기업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구원함을 받고 영생함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부요한 자가 아닙니까? 현재의 우리 모습이 고통스럽고, 헐벗고, 갇히고, 병든 자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천국을 소유한 부요한 자입니다.
10-11절: 이 일에 내가 뜻만 보이노니 이것은 너희에게 유익함이라. 너희가 일년 전에 행하기를 먼저 시작할 뿐 아니라 원하기도 하였은 즉 이제는 행하기를 성취할지니 마음에 원하던 것과 같이 성취하되 있는 대로 하라.
부한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이나 대부분 교회를 찾는 주된 목적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더 많이 얻기 위해서인데 성경말씀이 종종 우리에게 부담을 줍니다. 그러나, 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임하는 평안과 기쁨과 감사의 마음이요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서 받을 상급으로 쌓여갑니다(deposit).
하나님의 진정한 축복은 잠시 보이다가 없어져버릴 이 세상에서 일시적으로 누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소망 중에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눈에 보이는 형제·자매들에게 나누어주기를 원합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시점으로부터 일년 전에 고린도 교인들은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는 헌금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늦게 시작한 마게도냐 교회들은 벌써 모금을 완료하였는데 고린도 교회는 아직도 모금이 지지부진한 가운데 있습니다.
“이제는 성취할지니 마음에 원하던 것과 같이 성취하되 있는 대로 하라.”고 간곡하게 청합니다.
바울은 답답한 심정이지만 어찌할 수가 없어서 그들의 자발적 의지에 호소할 뿐입니다.
12절: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헌물과 기뻐하시지 않는 헌물의 원형이 아벨과 가인의 제사입니다. 두 제사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아벨의 제사는 구분됨과 정성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담겨 있었던 반면에, 가인의 제사는 구분됨이 없었고 정성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더더욱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과부의 두 렙돈을 칭찬하셨습니까? 이는 그 과부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의 삶의 전부를 드렸기 떄문입니다. 부자에게는 두 렙돈이 하찮은 것이지만, 이 과부에게는 그의 생활비 전부인데 이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드렸기에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연보의 본이 된 것입니다.
13-15절: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平均)케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저희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저희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하게 하려 함이라. 기록한 것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바울은 평균(平均)의 경제원리를 설명합니다. 평균의 원리는 우리의 풍요로운 것--유여(裕餘)한 것을 부족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마음입니다. 이리할 때,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부요(富饒)한 것으로 우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줄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믿는 사람들간에 균등화되어 영적으로, 물질적으로 부족한 것이 없는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의 평균의 경제원리의 근거를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광야생활에서 찾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만나를 내려주실 때, 한 사람 몫으로 한 오멜씩을 거두라고 말씀하셨는데(출 16:15-18), “어떤 이는 많이 거두고, 어떤 이는 적게 거두었으나, 그들이 먹을 때에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었고, 적게 거둔 자에게도 부족함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아무도 아침까지 거둔 것을 남겨두지 말라고 했는데, 욕심이 발동하여 혹은 하나님이 그 다음날 만나를 내려주시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불신의 마음으로 모세의 말을 따르지 않고 거둔 만나를 남겨둔 자는 거기에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남을 경험하게 되며 모세의 진노의 대상이 됩니다(출 16:19-20).
장로교의 창시자인 칼뱅(John Calvin, 1509-64)도 바울의 평균의 경제원리를 이어 받았습니다. 칼뱅은 “물질적으로 부한 자는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그의 물질의 풍요를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도록 부르심을 받았고, 영적으로 부한 자는 그리스도의 대리자(vicar
of Christ)로서 그의 영의 풍요를 영적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도록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리할 때, 믿는 자의 공동체가운데 영적으로·물질적으로 궁핍함이 없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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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경제계획(엡 1:9)은 “인간구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되 영적으로뿐만 아니라 물질적으로도 구원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 구원계획을 알게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용하셔서 아직 하나님의 구원에 들지 못한 자를 구원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도 영적으로 뿐만 아니라 물질적으로도 부요한 자의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시는데, 그것은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평균의 경제원리”에 따라서 살 때 가능합니다.
여러분의 물질적으로 혹은 영적으로 유여(裕餘)하신 것을 가지고 주위의 물질적으로 영적으로 빈곤한 자를 돌아보고 나눠줌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으로 부요한 자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