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후서를 마치면서” (살후 3:16-18)
3:16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주는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실지어다.
17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이는 편지마다 표적이기로 이렇게 쓰노라.
1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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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화가가 무서운 풍랑 속에서 조난을 당할 위험에 처해 있는 배를 그렸습니다. 그림 속의 그 배는 많은 사람들을 태운 채 망망한 바다 한 가운데서 침몰 직전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배에 탄 사람들이 모두 겁에 질려서 비명을 지르고 구조를 요청하며 공포에 사로잡힌 모습이어야 할 터인데 겁에 질리기는커녕 여유 있고 평안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림 속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 배의 선장이 다름 아닌 예수님이셨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의 평안은 주변 환경이 순조로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 평강의 하나님인데서 오는 것입니다.
찬송가 작사자 스파포드(H. G. Spafford)는 시카고에 커다란 화재가 발생하였을 때 전 재산을 잃었습니다. 사건이 있은 직후에 그는 상심한 가족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유럽여행을 계획하였으나 자신은 화재를 당한 무디 교회를 보살피기 위하여 남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의 부인과 네 딸을 실은 여객선이 영국 배와 충돌하여 그의 부인과 네 딸을 포함하여 승객 226명이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그는 찢어질 듯한 마음의 아픔을 느꼈지만 이내 신앙으로 극복하고 찬송가 470장을 작사하였습니다:
1.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후렴)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2. 저 마귀는 우리를 삼키려고 입벌리고 달려와도 주 예수는 우리의 대장 되니 끝내 싸워서 이기겠네.
(후렴)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3. 내 지은 죄 주홍빛 같더라도 주 예수께 다 아뢰면 그 십자가 피로써 다 씻으사 흰눈보다도 더 정하겠네.
(후렴)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4. 저 공중에 구름이 일어나며 큰 나팔이 울려날 때 주 오셔서 세상을 심판해도 나의 영혼은 겁 없겠네.
(후렴)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다윗은 그의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에게 쫓길 때에도 그의 목자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부족함이 없음을 고백합니다 (시편 23편):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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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절: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주는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실지어다.
하나님은 많은 속성을 가지고 계신 분이십니다. 우리를 창조하시매 “창조의 하나님”이시요, 우리에게 사랑으로 역사하시매 “사랑의 하나님”이시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매 “생명의 하나님”이시요, 우리의 소망되시매 “소망의 하나님”이시요,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시매 “구원의 하나님”이시며, 우리를 위로하시매 “위로의 하나님”이시요,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매 “평강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로마서 15장 5절에서는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면 오래 참으시고 우리를 격려하고 위로하시는 분이십니다. 어떤 영어성경은 인내(perseverance) 대신에 “steadfastness"(RSV)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즉, ‘한결같으시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변함 없이 한결같으심으로 오래 참으시고 연약한 우리를 책망하시기보다는 격려하고 위로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은 우리의 약하고 불완전한 가운데 하나님께 늘 가까이 나아가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로마서 15장 13절에서는 “소망의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십니다. 낙담하는 사람도 하나님을 바라보매 소망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소망 중에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볼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3절에서는 “자비와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며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시요, 슬픔과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위로(慰勞)”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클레시스”(παράκλησις)는 ‘용기를 돋우어주다’, ‘도와주다’, ‘위로하다’, ‘(대신) 요청하다’, ‘구원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 26절에서 “보혜사(保惠師)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에 보혜사(Helper) 성령께서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위로하는 자, 도와주는 자--입니다.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아버지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위로자(Comforter)--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되어주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거기 계셔서’ 우리를 도우시고 위로하시고 용기를 주시는 “여호와 삼마”(Jehovah is there, 에스겔 48:35)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심은 우리로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오늘 본문에서 “평강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매, 우리가 세상의 일로 번민하거나 미혹되지 아니하므로 “온전히 거룩하게” 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에 예수님께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주시기를 원하신 평안(평화 또는 화평)은 세상에서 무엇을 얻었거나 이루어서 주어지는 일시적인 그러나 곧 잃을까봐 불안한 그런 평안이 아닙니다. 구원을 얻고 영생을 보장받은 자의, 동록이나 도둑이 침입할 수 없는 하늘창고에 보화를 쌓는 사람의 뿌듯하고 영속적인 마음의 평안입니다. 성도들은 여러 가지 다른 형편과 처지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을 그 가운데 갖게 됩니다. 이것이 천국을 소유한 천국 백성의 평안입니다.
고린도후서 13장 11절에서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느끼고 아는 것보다 더 큰 위로와 든든함이 없습니다.
환난과 고통 가운데 불안하여 함은 하나님께서 혹 안 계신 것이 아닌가 또는 나를 버리신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 때문입니다. 험한 산길을 갈 때에나 깊은 골짜기를 갈 때에나 하나님께서 ‘내가 너와 함께 있다’고 작고 낮은 목소리로 말씀하시는 음성을 듣기만 한다면 이 사람은 불안하여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윗의 일생이 쫓김과 고통과 환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끊임없이 찬송합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였습니까? 그는 끊임없이 그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하고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28장 20절에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확신을 주십니다.
17절: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이는 편지마다
표적이기로 이렇게 쓰노라.
바울의 육체적 조건이 열악(劣惡)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를 쓸 때 바울의 나이가 55-60세쯤 되었습니다. 지금은 60세가 장년의 나이요 한참 일할 때지만 바울 당시에는 노인의 나이로 배나 육로로 여행하기에는 적잖이 힘든 나이였습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바울은 눈이 성하지 못하였습니다. 아마도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빛 가운데 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아나니아의 안수기도로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되었다고 하지만(행전 9:18), 이후로 그의 눈은 성치 못하고 쉬 피로하고, 눈물이 나고, 글을 쓸 수도 없는 지경이었습니다(갈 4:15 참조). 그는 고린도후서 12장에서 보는 바 대로 이 문제(“육체에 가시”, 고후 12:7; “육체의 약함”, 갈 4:13 참조)를 놓고 열심히 기도하였지만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평생을 그대로 살아가야 했습니다. 이것이 그에게 역사하신 “예수님의 흔적”이기에(갈 6:17) 그는 육체적 고통 중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바울의 눈이 이와 같기에 그의 편지는 대서(代書)되어집니다. 로마서는 더디오가 대서했고(롬 16:22), 고린도전서는 소스데네가 대서했습니다(고전 1:1). 그러나, 바울은 편지들이 그에게서 온 것임을 보이고 또한 그의 사랑을 전하기 위하여 마지막 부분의 문안인사는 친필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11절에도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고 했고, 골로새서 4장 18절에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나의 매인 것을 생각하라.”고 했고, 데살로니가후서 3장 17절에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이는 편지마다 표적이기로 이렇게 쓰노라.”고 했습니다.
저는 바울의 이 말씀이 은혜가 됩니다. 여건이 아무리 좋지 않아도 바울만큼 좋지 않은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그가 선교사로서 이곳 저곳을 다녀야 하는데 눈이 성치 못하니 그 고통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사용하고자 하셨을 때 그가 위대한 사도로 쓰임 받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가끔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교회 봉사를 잘 하지 못하는 어려운 사정들을 말합니다. ‘나는 무엇이 이래서’, ‘나는 무엇이 저래서’ ... 무엇이 문제입니까?
우리의 외적 환경이나 육체적 사정이 정말 어려워서 주님의 일을 잘 감당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우리에게 감당할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까?
18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수는 돌에 새긴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받은 바 은혜는 큰 것이라도 돌아서는 순간 잊어버리고 남이 섭섭하게 대한 것, 나에 대해 해를 가한 것에 대해서는 조그마한 것이라도 다 기억하여 두고두고 잊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값없이 주어지는 것(free gift)이기에 우리는 하찮게 여기거나 쉽게 잊어버리고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값이 없다”는 것은 하찮은(valueless)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값으로 계산할 수 없을 만큼(priceless) 귀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귀한 은혜이기에 우리는 이를 마음 판에 새기고 오래오래 기억하여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그 은혜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의 함께하심과 사랑의 빛에 노출되고 우리가 받은 그 사랑의 빛을 다른 사람들에게 반사하는(reflect)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 가운데 들어온 사람은 이제 다시 그 은혜와 사랑을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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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에 평안이 있습니까?
더욱 더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이 넘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삶이 각박하고 불안하여 평안을 느끼지 못합니까?
평강의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불안함과 초조함이 사라지고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이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은혜를 먼저 받은 사람으로 다른 사람들과 주님의 은혜를 나누기를 힘쓰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