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August 25, 2013

“아들의 복음 안에서” (로마서 1:1-17)

“아들의 복음 안에서” (로마서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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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眞理)에 대한 갈구가 있는 사람은 그 진리를 만나는 순간에 희열(喜悅)을 느낍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진리를 발견하는 비결은 우리의 마음을 비우고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학문은 ‘의심의 눈,’ ‘비판의 눈’을 갖고 있어야 발전이 있지만, 우리의 믿음은 이러한 것이 장해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높은 곳에 올라가서 시내를 내려다보면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옵니다. 맑은 날 엠파이어스테이트(Empire State) 빌딩이나 씨얼스(Sears) 빌딩 꼭대기에서 뉴욕이나 시카고시를 내려다보면 그 도시의 모양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개가 낀 날은 아무리 높은 곳에 올라가서 시내를 내려다보아도 그 모습을 헤아려 알 수 없습니다. 안개가 짙으면 짙을수록 우리 육신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에서 우리는 우리가 보기를 원하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우리의 눈이 의심이나 교만이나 욕심의 안개로 가리워져 있을 때 우리는 우리가 보기를 원하고 발견하기를 원하는 믿음의 진리를 보거나 발견할 수 없습니다.

요한 웨슬레(John Wesley)가 이미 목사로 안수받았고 선교를 하겠다는 열정으로 선교지 죠지아(Georgia)에 도착했지만 그의 선교는 제대로 되지 못합니다. 세월만 허비하다가 밤중에 도망치다시피하여 영국으로 돌아옵니다. 영국으로 돌아오는 배위에 있는 그의 마음은 무언가 채워지지 않은 공허가 있습니다. 폭풍이 그가 탄 배를 뒤흔들 때 그는 죽음의 두려움을 느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 때, 같은 배를 타고있던 모라비안교파의 크리스챤들은 찬송을 부르고 있습니다. 그 찬송이 평안함을 느끼게 합니다. 웨슬레는 생각합니다. ‘나는 목사인데도 이렇게 마음이 불안하고 두려운데 저 사람들은 어떻게 이 풍랑속에서도 저렇게 평안할 수 있을까? 동일한 예수님을 믿는데 왜 나에게는 저런 기쁨과 평안이 없을까?’ 그의 의문과 고민을 해결하지 못한 채 그는 자신의 목사로서의 사명을 생각하며 고민합니다.
                                                   
어느 날 런던의 올더스-게이트(Aldersgate) 거리를 걷고있다가 조용한 찬송이 흘러나오는 교회의 문을 들어섭니다. 무명의 목사가 루터의 로마서강해 서문을 읽고있는데 이를 듣고있던 요한 웨슬레의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믿음의 진리를 발견한 웨슬레는 그 작은 교회 한 구석에 앉아서 한없이 눈물을 흘립니다. 그가 옥스퍼드(Oxford) 대학을 나왔고 대학 때에도 홀리 클럽(Holy Club)을 조직하여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였고 이미 25세의 젊은 나이에 엥글리칸(Anglican) 교파의 목사로 안수받은 장래가 촉망되는 엘리트 목사였지만 이전까지 그에게는 구원의 기쁨이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그는 머리(head)만이 크리스챤이었지 가슴(heart)은 신앙이 없었습니다. 그의 나이 35세에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거듭난 체험으로 말미암아 그는 감리교의 창시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요한 웨슬레를 거듭나게 한 로마서강해를 쓴 루터는 16세기를 산 독일의 신부 출신의 종교개혁자입니다. 그가 아직 신부로 있을 때 그의 마음은 평온치 못하였습니다. 그가 아무리 고행을 하여도 죄사함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로마에 있는 성당의 계단을 팔꿈치와 무릎으로 기어서 오르락 내리락 하여도 그의 죄는 여전히 그 안에 머물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던 그에게 한 말씀이 들어왔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 로마서 본문 1:17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해서, 루터는 ‘Sola Fide'(오직 믿음으로)란 슬로건을 내세우고 종교개혁을 성공적으로 단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선한 행동과 고행으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면죄부를 사는 것으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우리의 구주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에 대한 깨달음은 일찍이 바울의 깨달음이기도 합니다. 그가 바리새파에 속한 유대인으로서 하나님의 율법을 철저히 지켰지만, 그는 그가 죽음을 지켜본 집사 스데반의 기쁨과 평안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다메색 도상에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그는 우리 인간의 구원이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해서, 그는 세상에서 그가 귀히 여기던 모든 것을 배설물과 같이 여기고 그에게 영원한 생명과 기쁨을 주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도로 변화됩니다.
 

2

오늘 본문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 세 부분에서 바울은 복음(good news)을 세 가지 명칭으로 부릅니다. 1-7절에서 바울은 일 ‘하나님의 복음’(1절)에 대하여 증거합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없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속에 이제 때가 되어서 우리 인간들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8-15절에서 바울은 이를 ‘그의 아들의 복음’(9절)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뜻이 나타났는데 육신의 몸으로 그의 아들을 통하여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육신(incarnation)하셔서 인간 가운데 사심은 아버지의 뜻을 나타내시기 위함이심입니다. 16-17절에서 바울은 동일한 복음을 ‘그리스도의 복음’(the gospel of Christ, KJV)이라고 부릅니다. 이 복음은 그리스도 우리 구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1절에서 바울은 자기가 사도로 부르심을 받고 택정함을 얻은 것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도(ἀπόστολος)란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란 뜻입니다. 종(δούλος)은 주인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입니다. 바울의 종되고 사도된 것은 그를 부르시고 택정하신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복음은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 팔레스틴지역 나사렛 목수 출신의 예수라고 하는 한 선생에 의해서 창시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미리 계획하시고 구약의 선지자들을통하여 미리 알게 하신 것입니다. 해서 역사성을 갖고 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그리스도의 탄생과 고난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심과 다시 오셔서 사단으로 발등상 되게 하실 것을 예언하지만 이를 깨달아 아는 자가 드물었습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는 또 우리 인간과는 동떨어진 존재가 아니요 다윗의 혈통으로 말미암는, 인간의 아들로 오시는 개인성을 갖고 계십니다.
우리 인간의 이 땅에서의 권리가 첫 사람 아담의 범죄함으로 사단에게 넘겨졌는데, 인간의 편에 서서 이 토지에 대한 권리를 되찾아주시기 위해서 우리 각 사람의 친척, 고엘(לאוג)--‘토지무를 자’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방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한 것입니다.

5절에,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했습니다.

8-15절에서 바울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을 방문하기를 원하는 그의 마음을 전합니다. 이는 그들을 만나볼 때, 박해 가운데 믿음을 지키는 그들을 위로하고 돕기 위할 뿐 아니라 그 자신도 안위받고자 함입니다. 바울이 이 로마서를 쓴 것이 그의 3차 전도여행의 말기, 고린도지방에서 모금한 돈을 가지고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향하여 가기 전입니다. 이후에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고, 거기서 유대인들에게 붙잡히는 몸이 되고, 사슬에 묶인 바 되지만, 그의 소망대로 로마로 보내지며 가택연금의 상태에서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을 만날 기회를 얻게 됩니다.

11-12절에,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주어 너희를 견고케 함이니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했습니다. 무슨 신령한 은사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아마도 박해를 소망가운데 견디는 능력과 오래 참음의 은사일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빚진 자’(debtor, ὀφειλέτης)라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하는 의로운 삶을 살아왔노라고 했지만, 기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잔해(殘害)하고 죽이는 일에 동참함으로서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뜻을 방해한 그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은혜(恩惠)로 함께 하시며 그를 부르시고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복음증거자의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죽음에 이르는 죄의 빚을 진 빚진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죽을 죄인들을 사랑해주셨으니 또한 사랑의 빚진 자입니다.

우리의 하나님께 진 빚은 하나님께 갚을 길이 없습니다. 우리가 빚을 갚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증거하는 것이며 그의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바울은 빚진 자의 심정으로 15절에서,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말하고 있습니다.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우리의 빚을 갚는 방법입니다.

16-17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서 세 가지를 기술합니다:
첫째는 복음에 대한 바울의 태도(態度)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아니 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가운데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이 크리스천인 것을 밝히 나타내지 못하며, 자신을 구원하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는 것에 대해서 주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는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까닭입니다. 복음을 담대하게 증거함이 하나님을 자랑함이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복음의 성격(性格)입니다. 17절 전반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 of God)는 하나님의 두 속성 중에 하나입니다.
                                                 
하나님께는 ‘선하시다’(good)는 속성과 ‘의로우시다’(righteous)는 속성이 있으신데, 인간들을 사랑하시고 긍휼을 베푸시는 것이 하나님의 선하심에 속한 것이라면, 불의(unrighteousness)와 함께 하실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의 불의와 함께 하지 못하는 것--그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불의한 자에 대한 심판이십니다. 영존하시는 하나님, 엘 올람과 함께 하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데, 불의함으로 하나님과 함께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지 못하며, 이것이 바로 어둠이요 형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불의한 인간에게 나타남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나타납니다. 불의한 인간이 의로와질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믿음으로 시작하여 믿음으로만 이를 수가 있습니다.
죄의 속성을 속에 가지고 있는 우리들은 우리 스스로--우리의 행위로, 노력으로, 돈으로도, 학식으로도, 명예로도--의로와질 수가 없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서만 의로와질 수 있습니다.
‘의로와진다’(justified)는 말의 뜻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감히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는 뜻입니다. 불의했던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길은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덧이었을 때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한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의의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우리의 죄가 흠없는 예수 그리스도께 전가되고 우리는 그로 말미암아 깨끗함을 입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바울은 복음의 내용(內容)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바울은 이 로마서의 중심 주제를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그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로 알게 하신 것입니다. 다만 그들의 영의 눈, 믿음의 눈이 가리워져 발견치 못한 따름입니다. 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로 성육신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의 본체를 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반문(反問)할 것입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그러면 궂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없더라도 하나님 아버지를 믿을 때에 우리가 의로와질 수 있고 구원함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맞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함은 눈에 보이는 육신의 부모와 형제·자매는 사랑치 않으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사랑한다 하는 헛된 고백(告白)과도 갖습니다. 인간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여서 제 갈길로 가기에,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본체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셔서 육으로 임하신 하나님을 보여 주셨는데 이를 거부하고 믿지 않으며 이제까지 믿지 않던 하늘 아버지를 믿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 미련하고 연약한 인간들은 보이게 임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를 우리의 구원자로 받아들임으로 의로와지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구원함을 얻고,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거하는 영생함을 누리는 것입니다.

3

바울은 로마서의 기본교리인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위하여 창세기 15장 6절과 하박국 2장 4절을 인용합니다. 창세기 15장 6절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의로 여긴 바 된 것은 바로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박국 2장 4절에서 의인이 삶을 얻는 것은 믿음을 끝까지 잘 지킬 때 가능하다고 합니다. 바울은 이 둘을 연결하여서, 우리 인간이 의로와지는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며, 이 믿음을 끝까지 잘 지킴으로 우리가 영원한 삶을 살게된다고 증거합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인간이 어떻게 의인이 되는지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고,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 했지만 바울은 창세기 15장 6절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예에서 우리 연약한 인간이 의인이 되는 길을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님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와지시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사시는 기쁨과 평안을 발견하시는 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