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April 2, 2023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요한복음 1:1-18)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요한복음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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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기 교부 신학자였던 아타나시우스(Athansius)는 그의 책 “말씀의 성육신(The Incarnation of the Word)”에서 왜 성자 하나님이 성육신하셔야 되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우리가 '그가 육신이 되신 원인'입니다. 그는 우리를 매우 사랑하셨기에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인간의 육체의 모양으로 태어나셨습니다. ... 그 누구도 아닌, 무에서 모든 것을 창조하신 구주만이 썩어질 것을 썩지 않을 것 되게 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 누구도 아닌, 아버지의 형상이신 예수님만이 사람을 재창조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 누구도 아닌, 생명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죽을 것을 죽지 않을 것으로 만드실 수 있었습니다. 그 누구도 아닌, 참되신 아버지의 독생자 되신 말씀만이 아버지에 대하여 가르치시고 우상을 파괴하실 수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지은 죄의 삯은 지불되어야 하는 것이기에 (그 삯은 사망이기에) 그리스도께서 우리 중에 오셨습니다.”
아타나시우스는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모양으로 오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은 터무니없고 신성모독이라고 주장하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 대응하여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인간의 모양으로 오셔야 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였습니다.
11세기 중세의 신학자였던 안셀름(Anselm)도 그의 책 “하나님이 왜 사람이 되셨나(Cur Deus Homo)”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이 땅에 내려올 수밖에 없던 이유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안셀름은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하나님은 인간을 구하실 수 없으시기에 스스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시고 사람들 중에 사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고 강변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속성과 인간의 죄에 연약한 속성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에게는 그 스스로 인간에게 내려오시고 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희생말고는 다른 선택이 없으셨다는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는 그들의 죄와 허물에서 벗어날 수 없고, 하나님은 죄와 허물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어떤 만족할 만한 것을 지불해야 하는데 인간에게는 지불 능력이 없기에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그의 상실된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만족할만한 대가(代價)를 스스로 지불하시고 그가 사랑하는 인간을 죄와 허물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육신의 모양으로 내려오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역사들 가운데 인간의 모양으로 사람들 사이에 태어나신 하나님의 대속적인 사랑을 이해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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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여기의 “태초(太初)”는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보다도 더 먼 근원적(根源的)인 태초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가 천지창조 즈음의 시기라고 한다면, 요한복음 1장 1절의 태초는 천지창조는 물론 하늘의 천사들도 아직 창조되기 전, ‘스스로 계신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이 계시던 때입니다.
‘시작도 끝도 없는 시간’의 무한한 영속성 가운데 존재하시는 그 말씀에 대한 기술입니다.
“말씀이 계시니라”고 표현한 것은 성자 하나님의 존재 형태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부하나님은 하나님의 대표격으로 말씀과 지혜 또는 생각을 포함한 전부를 말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성자 하나님, 하나님의 생각 또는 지혜는 성령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설명할 때 ‘삼위일체’(Three Persons in One Nature)라는 개념을 도입합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입니다.
한 분 하나님이 성부하나님(아버지 하나님), 성자하나님(아들 하나님)과 성령하나님이라는 세 가지 위격을 가지신다는 것입니다.
쉽게 설명하자면, 이중에 성부하나님은 하나님의 본체(main body)이시고, 성자하나님은 본체이신 성부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이고, 성령하나님은 본체이신 성부하나님의 지혜(Wisdom) 혹은 생각이십니다.
요한은 이 말씀이신 성자하나님이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증거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라고 기록합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뜻 혹은 생각이 말씀으로 표현될 때 그 ‘말씀’이 하나님(성자하나님)임을 밝힘입니다.

2-3절: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창세기 1장의 하나님의 창조는 ‘말씀의 창조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 빛을 만드실 때, 궁창을 만드실 때, 해와 달과 별들을 만드실 때, 땅 위의 생물들과 식물들, 바다의 물고기들을 만드실 때 ‘가라사대’의 창조였습니다.
‘가라사대’의 창조는 곧 말씀으로 역사하시던 성자 하나님과의 ‘협력창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4절: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그 (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다”고 말씀합니다. 그 말씀 곧 성자 하나님 안에 생명이 있다고 함은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 말씀이신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입니다.
하기에,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말씀함은 생명은 사람들에게 밝음을 주는 것임을 의미합니다. 해서, “생명의 빛”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예수님은 요한복음 8장 12절에서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5절: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생명의 빛” 되신 예수님께서 어두움을 비추시기 위하여 오셨지만 그의 구원사역을 깨닫지 못한 세상사람들의 영적 무지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6-8절: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6-8절에서는 세례요한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세례요한은 누구인가 하면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사람이요 그의 증거로 인하여 사람들로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고자 한 사람입니다.

9-11절: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참빛이신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세상에 속하여 있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비취셨습니다.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 하면 그가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말씀으로 창조하신 세상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의 오심과 오심의 이유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팔레스틴 유대 땅에서 태어나셨으나 대부분의 유대인이 그를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12-13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은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출생한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태어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곧,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들마다 하나님의 뜻으로 난 자들이란 뜻입니다.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성경 속의 많은 증언들 중에 이 말씀보다 더 귀하고 감격스러운 말씀이 드뭅니다.
태초로부터 말씀으로 계셨던 성자하나님이 육신의 옷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육신이 되어”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외형을 표현할 때, 육신(flesh: σάρξ)이라고도 하고 몸(body: σώμα)이라고도 합니다.
몸(body)은 사람의 외형에 대한 긍정적(肯定的)인 표현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사람이 부활(復活)할 때 썩지않을 몸, 영광의 몸을 입는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육신 혹은 살(flesh)은 사람의 외형에 대한 부정적(否定的)인 표현입니다. 같은 고린도전서 15장 50절에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blood)과 육(flesh)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즉, 말씀이신 아들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입고오신 인간의 외형은 낮고 천한 모습, 썩어질 것을 표현하는 육신을 입고오신 것입니다.
인간의 상처와 고통과 슬픔을 몸소 체험하시고 그들을 위해서 눈물 흘려주시기 위함이며, 그들을 위로하시고, 그들을 고통과 슬픔에서 구원하여 주시기 위함이심입니다.
               
히브리서 2장 18절에서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알려주시기 위함이며,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영광을 본다”고 했습니다.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말씀합니다.
영광은 무엇인가 하면 해에서 나온 햇빛과 같습니다.
햇빛이 비췸을 보면서 해를 생각합니다.
영광은 본체이신 하나님의 능력과 인자와 엄위를 헤아리게 하는 수단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솔로몬 성전의 지성소에 머무셨습니다.
열왕기상 8장 11절(비교: 역대하 5장 14절)에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인하여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하나님, 역대하 5:14)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영광을 봄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성전에 비유하셨습니다.
성전 되신 예수님의 몸 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머뭅니다.
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봄으로 본체이신 하나님이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했습니다.
이 은혜(χάρις)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인데 인간을 구원하여주심입니다.
진리(ἀληθεία)는 하나님의 변치 않으심입니다. 말씀으로 계신 그리스도의 영속성(永續性)입니다.

15절: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세례요한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성자 하나님-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증거합니다.
그가 세례요한보다 육 개월 정도 뒤에 태어나시고 사역도 그보다 뒤에 시작하셨지만 세례요한은 증거할 때에 그가 자기보다 앞서다고 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세례요한이 태어나기 이전, 아니 세상 만물이 생성되기 훨씬 이전인 태초부터 계셨던 하나님 되시기 때문입니다.

16절: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우리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충만한 데서 은혜에 은혜를 받습니다.
이 은혜를 어떤 영어성경은 축복(blessing)이라고도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의 충만함으로 믿는 성도들이 받는 것은 은혜의 빛-복이라는 것입니다.

17절: 율법은 모세를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지시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시들 율법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나타내기 위함이지 이것이 사람들을 구원으로 들이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인간을 향하신 무한하시고 변치 않는 사랑과 은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여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18절: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에녹이, 노아가, 모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표현하지만, 그들은 그저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간 자들이요 빽빽한 구름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하나님의 그림자 또는 뒷모습 또는 영광을 본 사람들입니다.
해서, 그들이 하나님을 아는 것도 피상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2,000년 전에 우리에게 다가오신 예수님은 바로 그분이 하나님이시요, 하나님이 육신의 모양으로 오신 분이십니다. 성자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오신 분을 예수님이라고 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인생들을 사랑하시기에 인생들에게 하나님을 더욱 더 나타내시기 위함이심입니다.

                                                                            32,000년 전에 육신의 옷을 입고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이 여러분 삶 가운데 느껴지십니까?
17세기에 살았던 안젤루스 실레시우스(Angelus Silesius, 1624-1677)는 “Wär' Christus tausendmal in Bethlehem geboren und nicht im mir--ich wäre doch verloren (그리스도께서 (유대 땅) 베들레헴에 천 번을 나셨다고 해도, 내 안에서 나신 바 되지 않았더면 나는 여전히 잃은 자였으리라).”고 증거합니다.
오늘 이 시간 여러분 안에 2,000년 전에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느끼는 경험을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Sunday, September 30, 2018

“평균의 경제원리” (고후 8:7-15)


 평균의 경제원리” (고후 8:7-15)
               

   8:7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8      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다른 이들의 간절함을 가지고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코자 함이로다.
     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10     이 일에 내가 뜻만 보이노니 이것은 너희에게 유익함이라. 너희가 일년 전에 행하기를
            먼저 시작할뿐 아니라 원하기도 하였은즉
     11     이제는 행하기를 성취할지니 마음에 원하던 것과 같이 성취하되 있는 대로 하라.
     12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
     13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平均)
            하려 함이니
     14     이제 너희의 유여(裕餘)한 것으로 저희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저희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하게 하려 함이라.
     15     기록한 것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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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Karl Marx, 1818-83)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95) 가장 이상적인 경제체제라고 믿었던 공산주의적 사회주의가 동독의 서독으로의 흡수통일, 소비에트연방(USSR) 붕괴 등으로 무너져 내린 것은 자기 능력을 인정받기 원하고 개인소유를 원하는 인간의 본성에 비추어 아마도 당연한 귀결이었다고 것입니다.
어린아이를 키우는 부모는 아이가 말을 하기 시작하는 전후부터 , 것을 구분하는 것을 보게 되고 대한 강한 소유욕을 표현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람들에게는 본능적으로 자기 것을 주장하고 움켜쥐고자 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두세 살에서 시작되는 사유욕(私有慾) 나이가 들어도 줄어들지 않고 죽을 때까지 계속됩니다.
그런데, 능력이 많은 사람이나 능력이 적은 사람이나 능력껏 일하되 동일한 것으로 분배하고 사유를 인정하는 대신에 국가가 모든 것을 소유하는 공산주의적 사회주의는 개인에게 이상(理想)만큼이나 매력적인 것은 되지 못하였습니다. 열심히 일하여도, 능력이 많아도 동일한 분배를 받는데 능력이 많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많은 수확을 거두고자 열심히 일할 사람이 없습니다. 공산주의가 이상적인 제도이긴 했지만 실패한 것은 인간의 본능을 과소평가한 까닭입니다. 국가가 강압적으로 강요한다고 하더라도 한계가 있습니다. 원래의 공산주의는 '국가도 계급도 없는' (stateless and classes) 능력껏 일하고 필요한대로 분배받는, 그러나 개인의 소유 (private ownership)가 아니라 공동소유 (common ownership)가 원칙인 사회입니다.
반대편에 있는 자본주의의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빈익빈 부익부’(貧益貧富益富) 사회가 되어간다는 것입니다. 자본주의가 이제까지 등장한 모든 경제체제 중에서 가장 좋은 것임이 사실이지만 역시 완전하지 않아서 부자는 점점 부자가 되고 가난한 자는 점점 가난한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다른 경제체제를 제시합니다. 경제체제는 자본주의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교회들을 중심으로 자본주의 체제의 단점들을 보충하여 줍니다. 적어도 같은 교회를 다니는 성도들 간에서는 교회를 통한 (빈부에 대한)  평균화 노력으로빈익빈 부익부 문제를 줄일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예에서 있는 공생주의(Commonism) 바로 그것입니다(행전 2:44-47, 4:32-35). 이것이 공산주의와 다른 것은 개인의 능력과 재능에 따른 경영과 소유를 인정하는데 있습니다. 마태복음 25(14-30) 나오는 달란트의 비유가 그렇습니다. 능력이 있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많은 것을 경영하여 많은 것을 이윤으로 남길 있고, “자발적으로(voluntarily)", "기쁜 마음으로(joyfully)" 자기의 유여한 것을 적게 남긴 자에게 나누어줍니다.
21세기 현재의 지역교회들도 사도행전에 나오는 자발적 공유의 생활을 있습니다. 자기 소유는 그대로 유지하되 자신의 유여한 바를 자발적으로, 기쁜 마음으로 헌금이나 기타의 형태로 교회를 통하여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들에게필요에 따라나눠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므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통하여 하기를 원하셨던 나눔의 사역을 감당하게 됩니다.

바울은 우리 믿는 사람들이빚진 ”( 8:12; 13:8)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빚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빚은 하나님께 것인데,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사랑과 은혜의 빚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의) 빚은 주위의 가난한 자들에게 빚이라고 말씀합니다. 로마서 15 25-27절에서,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유대인으로 오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복음)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말씀합니다.
물질적으로 가난하나 영적으로 부요한 자는 영적으로 빈곤한 자에게 영적인 빚을 자요, 영적으로 가난하나 물질적으로 부요한 자는 물질적으로 빈곤한 자에게 물질적인 빚을 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은 흔히나는 가진 아무 것도 없어서 나눠줄 것이 없어라고 말하는데 성경은그렇지 않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3(1-10) 보면 베드로와 요한 기도 시간에 성전에 올라갈 미문이라 하는 성전 문에 나면서 앉은뱅이가 구걸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가 그에게 이르기를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말씀할 , 앉은뱅이는 즉시 일어나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하나님을 찬미하였다고 했습니다.

송명희 시인이 작사한 복음송 「나」의 가사를 보면,
    가진 재물 없으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남이 없는 있으니 남이 것을 보았고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남이 모르는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남이 가진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남이 없는 갖게 하셨네.”
뇌성마비 중증의 환자인 송명희 시인에게도 다른 사람들보다 유여(裕餘) 것이 있고 따라서 그것을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 나눠줄 있습니다. 우리의 유여한 --물질적으로 혹은 영적으로-- 무엇인지 적극적으로 찾아보아야 것이며 나누기를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것입니다.

2
1-6절에서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하여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도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풍성한 연보를 바울에게 전하여준 마게도냐 교회들의 모범적인 헌신에 관하여 언급한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모금의 필요성을 설명합니다.

7절: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모든 일에 풍성한 것같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바울은 그들에게 작정한 돈을 내라고 강요하거나 명령하는 대신에, 그들의 선한 것에 호소(呼訴)합니다.
믿음”(고전 13:2)지식”(고전 12:8) 등은 고린도 교인들이 갖고 있던 장점들 성령의 은사들입니다. 위에 고린도 교인들에게는 (지나치리만큼) 은사들에 대한 간절함이 있었고 바울을 향한 (편지를 쓰고 있는 지금은 다소 빛이 바랜) 사랑함이 있었습니다.
그와 같이 성령의 은사와 사모함과 사랑함에 풍성한 것같이 은혜”--,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서 모금하는 일에도풍성하게하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신 은혜 인색하지 않고 풍성하였던 것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눈에 보이는 형제를 위해서 하는 은혜 인색함이 아니라 풍성한 것으로 하라는 당부입니다.

8절: 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다른 이들의 간절함을 가지고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코자 함이로라.

내가 명령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함의 표현이 의무감이나 명령으로 되어져서는 것입니다. 만일 그러하다면, 이는 율법주의로 흐르는 것입니다. 교회 봉사하는 일에 자원함이 없다든지, 헌금하는 일에 인색하더라도 구원 자체의 문제는 아닙니다.
바울이 마게도냐 교회들의 힘에 지나도록 넘치는 자원함을 언급한 것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헌금을 강요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선한 마음에 호소하여 그들도 하나님의 기쁨과 칭찬의 대상인 것을 확인시켜 주기 위한 것입니다.
모금에 참여하는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그가 내는 돈의 액수가 아니라, 그가 자원하는 마음, 기쁨으로, 주님께 받은 은혜를 돌려드리는 마음으로, 풍성한 마음으로 참여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너희의 사랑이 진실한 것인가 아닌가를 증명하는 이라고 바울은 말씀합니다.

9절: 우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부요하신 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하나님이십니다. 우주만물의 근원이시요, 이를 소유하신 부요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낮추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인간 가운데 거하시기 위하여 가난한 자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육신으로 세상에 오시되, 부유한 왕궁의 왕자로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가난한 목수 요셉과 마리아의 가정에 오실 , 베들레헴의 여관 마굿간의 누추한 곳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의 생애는 가난으로 점철(點綴) 것이었는데, 그는 공생애기간중 마땅히 누울 아늑한 칸도 소유하지 않으셨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와 같이 가난하게 되심은그의 가난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말합니다.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이 어떻게 우리로 부요케 합니까?
예수님께서 가난의 옷을 입고 우리에게 오신 것은 이제까지 심령이 가난했던 자이거나, 경제적으로 가난했던 자이거나 간에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을 듣고 이를 받아들이게 하기 위함이심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복음의 말씀을 듣고 그를 주님으로 영접함으로 심령이 부요한 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이예수님의 가난으로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하심이라고 말씀함은 믿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고, 예수님의 가난의 의미를 생각하는 것이 부요해지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난케 되심으로 그를 바라보는 사람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고 기업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구원함을 받고 영생함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부요한 자가 아닙니까? 현재의 우리 모습이 고통스럽고, 헐벗고, 갇히고, 병든 자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천국을 소유한 부요한 자입니다.

10-11절: 일에 내가 뜻만 보이노니 이것은 너희에게 유익함이라. 너희가 일년 전에 행하기를 먼저 시작할 아니라 원하기도 하였은 이제는 행하기를 성취할지니 마음에 원하던 것과 같이 성취하되 있는 대로 하라.

부한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이나 대부분 교회를 찾는 주된 목적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얻기 위해서인데 성경말씀이 종종 우리에게 부담을 줍니다. 그러나, 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임하는 평안과 기쁨과 감사의 마음이요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서 받을 상급으로 쌓여갑니다(deposit). 하나님의 진정한 축복은 잠시 보이다가 없어져버릴 세상에서 일시적으로 누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소망 중에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눈에 보이는 형제·자매들에게 나누어주기를 원합니다.

바울이 편지를 쓰고 있는 시점으로부터 일년 전에 고린도 교인들은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는 헌금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늦게 시작한 마게도냐 교회들은 벌써 모금을 완료하였는데 고린도 교회는 아직도 모금이 지지부진한 가운데 있습니다.

이제는 성취할지니 마음에 원하던 것과 같이 성취하되 있는 대로 하라.” 간곡하게 청합니다.
바울은 답답한 심정이지만 어찌할 수가 없어서 그들의 자발적 의지에 호소할 뿐입니다.

12절: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헌물과 기뻐하시지 않는 헌물의 원형이 아벨과 가인의 제사입니다. 제사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아벨의 제사는 구분됨과 정성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담겨 있었던 반면에, 가인의 제사는 구분됨이 없었고 정성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더더욱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과부의 렙돈을 칭찬하셨습니까? 이는 과부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의 삶의 전부를 드렸기 떄문입니다. 부자에게는 렙돈이 하찮은 것이지만, 과부에게는 그의 생활비 전부인데 이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드렸기에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연보의 본이 것입니다.

13-15절: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平均)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저희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저희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하게 하려 함이라. 기록한 것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바울은 평균(平均) 경제원리를 설명합니다. 평균의 원리는 우리의 풍요로운 --유여(裕餘) 것을 부족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마음입니다. 이리할 ,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부요(富饒) 것으로 우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줄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믿는 사람들간에 균등화되어 영적으로, 물질적으로 부족한 것이 없는 풍요로운 삶을 있습니다.

바울은 그의 평균의 경제원리의 근거를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광야생활에서 찾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만나를 내려주실 , 사람 몫으로 오멜씩을 거두라고 말씀하셨는데( 16:15-18), “어떤 이는 많이 거두고, 어떤 이는 적게 거두었으나, 그들이 먹을 때에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었고, 적게 거둔 자에게도 부족함이 없었다 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아무도 아침까지 거둔 것을 남겨두지 말라고 했는데, 욕심이 발동하여 혹은 하나님이 다음날 만나를 내려주시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불신의 마음으로 모세의 말을 따르지 않고 거둔 만나를 남겨둔 자는 거기에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남을 경험하게 되며 모세의 진노의 대상이 됩니다( 16:19-20).

장로교의 창시자인 칼뱅(John Calvin, 1509-64) 바울의 평균의 경제원리를 이어 받았습니다. 칼뱅은물질적으로 부한 자는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그의 물질의 풍요를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도록 부르심을 받았고, 영적으로 부한 자는 그리스도의 대리자(vicar of Christ)로서 그의 영의 풍요를 영적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말합니다. 이리할 , 믿는 자의 공동체가운데 영적으로·물질적으로 궁핍함이 없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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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경제계획( 1:9)인간구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되 영적으로뿐만 아니라 물질적으로도 구원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 구원계획을 알게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 사람을 사용하셔서 아직 하나님의 구원에 들지 못한 자를 구원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도 영적으로 뿐만 아니라 물질적으로도 부요한 자의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시는데, 그것은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평균의 경제원리 따라서 가능합니다.
여러분의 물질적으로 혹은 영적으로 유여(裕餘)하신 것을 가지고 주위의 물질적으로 영적으로 빈곤한 자를 돌아보고 나눠줌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으로 부요한 자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